그런데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님’을 먹어야 한다는 실존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지구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배설물만 먹고서 생존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외부로부터 무기물과 유기물을 먹음으로써 살아간다. 그래서 먹고 먹히는 순환적 관계인 먹이사슬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생명의 그물망이 된다.
해월은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이다(萬事知食一碗)”라고 했고, 이를 한국의 대표적인 생명사상가 무위당 장일순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고 해석적으로 표현했다. ‘밥 한 그릇’, ‘나락 한 알’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진리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하면 ‘밥철학’ 혹은 ‘식(食)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원동력은 ‘밥심’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밥’은 생명력과 같다. 해월이 “인간은 밥에 의지한다[人依食]”고 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 생명력인 밥 한 그릇이 식탁에 오르게 되는 과정을 보면, 볍씨가 있어야 하고, 땅의 자양분이 있어야 하고, 태양, 빗물, 바람 그리고 농부의 땀 마지막으로 밥 짓는 정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밥 한 그릇을 포함하여 우리 식탁에는 ‘님’들의 피(생명)와 땀(노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밥도 음식도 모두 님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학의 ‘식고(食告)’의 이치가 있다. 해월은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反胞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해월신사 법설], <천지부모>)”고 했다. 모든 님들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식고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인정한다면 님들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밥 한 그릇의 이치’에는 해월의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라는 삼경사상의 이치가 있다.
동학의 경(敬)론은 원불교에서 은(恩)론으로 재해석된다. 소태산은 밥 한 그릇을 ‘은론’으로 설명한다. 그는 “밥 한 그릇이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 숟갈의 밥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라. 천지·부모·동포·법률의 큰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한 그릇의 밥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고, 밥을 만들어 준 사은님께 감사-보은할 줄 알아야 한다”(방길튼, [소태산! 서울 경성을 품다], 원불교출판사, 2016))고 했다. 소태산 역시 밥 한 그릇을 모든 님들의 은혜로 보았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도 식사를 시작할 때에 “잠간 마음을 모아 이 음식이 천지자연의 혜택과 동포들의 많은 노력의 결과로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여 줌을 감사하는 동시에 보은을 결심”([예전], 제1 통례편 제11장 식사)하고 식사를 한다.
이게 바로 ‘밥철학’과 ‘식철학’이다. 즉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밥철학)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시는 것(식철학)이다. 이러한 밥철학과 식철학에서 먹음은 님들의 피(생명)와 땀(노동)을 모시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밥철학과 식철학은 포식자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 이제 포식자의 입장이 아닌 피식자의 시선에서 먹힘의 문제를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가 악어의 눈을 통해 먹힘의 존재론을 주장했듯이, 우리에겐 먹힘의 철학도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 존재가 근원적으로 자연적 혹은 생태적 존재 그리고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지구인문학연구소-홈페이지>와 <브런치저널-지구인문학연구소>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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