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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칼럼 002] 인류세의 그대에게 드리고픈 이야기 / 이주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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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구인문학연구소> 오리지널 콘텐츠입니다.

이주연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지구인문학연구소 운영위원

                

                                                                                                                                               

               

서사무가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는 부친 오구대왕을 살리기 위해 저승 여행을 떠났다. 그는 솔잎으로 배를 채우고 바위틈에서 잠을 잤고, 마고할미의 빨래를 대신 해주었으며, 귀신들이 막아서는 열두 고개를 넘어섰다. 하늘사람 동수자의 청을 들어 혼인도 해주었는데, 아이 셋을 낳고 나니 외려 동수자는 바리를 버리고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바리의 삶은 위험의 연속이었고, 그 위험의 끝에서 결국 약수를 구하여 부친을 살렸다. 

바리의 여정은 늘 위험을 마주하는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작자 미상의 이 무속신화는 인간의 오랜 화두였던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놓인 위험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이고, 지금 우린 여기에 더하여 예측 불가능하고 변수 가득한 인류세의 ‘위험’들과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은 저서 [위험사회]에서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고 하여, 오늘날의 위험이 지구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역, 새물결, 2006) 전통사회에서 주요 위험은 신분제도와 빈곤, 생로병사 같은 것들이었다. 나머지 여섯 공주가 안전하게 지내는 동안 막내인 바리 홀로 효를 다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저승길을 떠났던 것도 ‘위계’라는 법칙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금의 위험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직위,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즘으로 치면 바리가 위험을 맞닥뜨리는 동안 여섯 공주도 ‘위험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가는 서사가 되는 게 맞다.

오늘날의 위험은 왜 모두에게 적용될까? 이 질문의 답은 다시 질문으로 환원된다. 바로 ‘모두’라는 키워드다. 우린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관계성은 지구화가 가속화되는 동안 더욱 강화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누군가의 ‘랜선이모’, ‘랜선삼촌’이 되어 친분을 쌓을 수 있다거나, 어떤 이의 탄소 배출이 전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어렵게 만들고, 또는 극지방 동물들의 서식환경도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 우리 ‘모두’의 연결 관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때의 ‘모두’에는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존재 또한 포함된다. 

연결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는 전 지구적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대처 방안을 만들고 있다. 2015년 ‘파리협정’, 2016년부터 2030년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s)’, 1990년부터 지속적으로 발행되어 온 ‘IPCC 보고서’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1999년 ‘지리산댐 백지화운동’을 시작으로 종교와 신념의 차이를 초월한 생명평화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 밖에 종교계의 동참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환경 문제라는 인류 공통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며, 원불교도 세 가지 윤리를 제시하여 이 과제를 풀어나가려 한다. 먼저 모두가 하나의 근원과 도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피부색이나 성별, 연령과 민족, 인간과 비인간 존재 여부를 불문하고 그 존귀함과 존재가치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러니 한편으론 세상 만물이 위험이라는 영향권에 동일하게 들 수밖에 없다. 스모그처럼, 위험은 민주적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리이기 때문에 인류세 시대의 ‘진리론’적 윤리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렇게 동일한 진리의 영향권에 머무는 우리는 본래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만물이 예외 없이 하나의 태포에서 나온 가족과 같다고 여기며, 이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9~2009)가 제시한 ‘지구공동체’ 개념과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된다. 연결이 되어 있는 만큼 서로에 대한 파급력도 큰데, 지구는 더 이상 우리 구성원들을 먹여주고 길러주는 ‘어머니 가이아’가 아니며 오히려 자정능력을 상실케 한 인간들을 향한 ‘가이아의 복수’만이 남았다고 주장하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의 견해(제임스 러브록, [가이아의 복수], 이한음 역, 세종서적, 2008)는 이 연결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지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모두가 얽혀있는 이 연결망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라야 존재론적 전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는 ‘존재론’적 윤리다.

앞의 두 윤리를 바탕으로 우리가 당면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협력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는데, 이는 ‘실천론’으로서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는 “지구 차원의 문제에는 지구 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전병근 역, 김영사, 2018)라고 말한다. 공생과 공존을 위해 공동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난세의 영웅이 세상을 바꾸었다면, 지금은 인류세의 ‘모두’가 세상을 회복시킬 때다.

인류세 시대의 새로운 '바리'들은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라의 절반을 하사하려는 부친의 마음을 거절하고 저승의 신으로 남았던 바리가 지금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면, 가이아의 복수를 돌이키기 위해 결국 저승으로의 발걸음을 떼지 못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지구 만물 ‘모두’와 함께,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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