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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강좌 007] 무궁한 자기생성의 무위이화 - 함이 있어 그럴 만하니 그렇다 / 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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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함께 읽기에서 오늘은 원래 순서인 「포덕문」의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천주조화지적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안다.”의 무위이화를 심고한다. 무위이화는 「포덕문」에서 1회 「논학문」에서 2회 나온다. 

세상이 그럴 만해서 수운이 났고 대각하여 동학이  자란 것이다. 동학 밖에서 보니 그럴 만한 자연한 이치로 동학이 나고 자랐다. 수운의 지극한 다함은 참형에 이르렀고,  해월은 수 십 년 도망자 신세로 포덕에 다함이 크고, 1894년에는 수십 만이 목숨을 내놓는 지극한 함이 있었다. 이 또한 그럴 만한 것이니 무위이화이나 동학인들은 함이 지극했던 것이다. 

만인만물이 하늘을 담은(시천) 조화정인 줄은 몰라도, 비가 내릴 만하니 내린 것이고, 이슬이 맺힐 만하니 맺힌 것이라고 사람들은 알았다. 자연한 이치라도 그 사건의 조화자들은 지극한 함이 있는 것이 무위이화다.  

그럴 만한 것은 수 많은 원인과 결과가,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 설켜서 조화 생성을 하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치가 '무위이화'이나 그 주체자들은 모두 서로 상보적 관계에서 하는 일이 없는 무위가 아니라 유위이다. 때가 되면 수 많은 함들이 있어서 그럴 만하니 세상은 바뀌고 다시개벽한다. 그러니 어찌 모든 주체들이 함을 다하여 전환에 힘 쓰지 않겠는가?   

세상에 아프고 쓰러진 사람이 많은데 작위함이 없이 자연한 이치에 따르라고 한다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생길까? 봄이 오면 여름이 온다는 자연필연성에 그저 순응하면서 살면 되는 것일까? 사람이 사는 사회는 자연필연성과는 다르다. 작위함이 없이 자연한 이치에 따라 살라는 말은 옳으나 고통스러운 세상을 벗어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주문수련하거나 수도승처럼 살거나 할 수는 없다. 수운의 '무위이화'를 '작위함이 없이 하늘님 이치에 따라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어제는 지나간 일이지만 오늘에 흔적을 남긴다. 어제란 오늘이 되어 있지 어제 자체는 없다. 5분 전도 그렇다. 

아이들은 늘 자란다. 엄마들은 아이의 변화를 금방 알아챈다. 엄마에게 아이는 늘 새롭다. 세상은 늘 같지 않고 언제나 새롭다.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새롭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어서 없어진 무()이지만 그것은 오늘의 무엇인가로 변화()해 있다. 어제로 말미암아 오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제는 사라진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무위이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위이화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하는 자기생성이다. 크게 말하면 우주창발의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새로움과 만난다. 어제 본 동무도 늘 '처음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다. 어제의 그가 아니다. 뭐가 변해도 변해 있다. 무위이화는 '처음뵙겠습니다' 와 같다

 

무위이화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앞질러 한 마디로 하면 이렇다. 무위이화는 시천한 자체자와 천(天)이 서로 감응하여 이루는 주체자의 자기생성 과정이다. 무위이화는 무로서 유를 이루는 우주 창발의 무궁한 진화적 되먹임 과정이다. 채식을 하거나 육식을 하면 그것들은 내 몸에서 생명으로 전환한다. 생명이 되면서 그 영양소들은 없음(無)이 되고 다른 것으로의 있음(有)이 된다. 차원 이동을 한다. 그래서 신령하다. 신령함이란 영과 기가 활성화하여 다른 차원으로 전환됨을 말한다. 만물은 모두 다 자기 차원의 신령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즐겨쓰는 말로 단백질이 생명이 되는 과정이 무위이화다. 생명은 단백질에서 왔지만 단백질로 환원한 수 없다. 이때 단백질은 무위가 되고 생명은 이화(而化)의 결과다. 흙의 기와 영이 어떤 종자에서는 고추가 되고, 다른 종자에서는 배추가 된다. 어찌 신령스럽지 않은가? 이 신령함을 밝히면서 과학은 발전해 왔다.    

 

수운의 말은 수운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수운은 포덕문에서는 무위이화의 뜻 풀이를 하지 않고 있다. 논학문에서는 9절과 13절 두 번에 걸쳐 무위이화의 뜻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수운은 「수덕문」 9절에서 수심정기는 유아지갱생(修心正氣 惟我之更定) - 오로지 내가 정한 것이다고 한다. 수운은 무위이화에 대해 「논학문」 9절에서 수심정기와 연관하여 분명하게 말한다. 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其는 하늘, 한울)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거느리고 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요.」 無爲而化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무위이화를 풀이한 것이다. ‘자연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일려면 시천활동에 다함이 있어야 한다. 그 다함이란 수운이 말한 그대로 “그(其는 하늘, 한울)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거느리고 그 가르침을’ 받도록 활동하는 것 즉 수심정기(守心正氣)를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억압된 천을 산(生) 천으로 활성화해야 한다.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천이 저 홀로 활성화될 리 없다. 그렇다면 그 천은 삼라만상과 감응하지 않는 독재자다. 모든 천지만물은 그저 신의 독재에 종속된 괴뢰주체가 되고 만다. 자연필연성의 늪에 빠진다. 오심즉여심인 천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에 이미 있는 천이 활성화되어 나와 하늘이 서로 둘이면서(各知) 하나인 상태(不移)인 ‘동귀일체’가 오심즉여심이다. 오심즉여심의 우주적 사건들의 과정생성에 이르는 과정이 곧 무위이화의 과정이다.  

동학을 이제 만나는 분들을 위해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이렇다. 꺼져 있는 컴퓨터(일체 생성의 근본), 끊어진 우주 네트워크(우주적 상보성)에 영(靈)과 기(氣)로서 로그온(조화생성) 하는 일이 시천 활동이다. 무위란 결국 천이 아닌 것들, 천을 억압하는 것들을 무위로 만드는 일이다. 무위를 직역하면 ‘함이 없음’이기도 하고 ‘무를 위한 함’이기도 하다. 이는 불연기연처럼 역설의 논리이기도 하다. 천이 아닌 것들을 없애기도 하고, 천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지하 식으로 말하면 반생명을 생명화하는 일이다. “죽임의 산업문명을 무위로 하는 활동을 통해 생명문명으로 전환하자.”처럼 쓸 수 있다. 영과 기, 시천주와 조화는 앞 글 「동경대전강좌006 –동학의 21자 주문과 현대과학」에 필자 나름으로 밝혔으니 참조할 수 있다

 

수운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설의 논리’를 가진 수운 특유의 대구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무위이화’는 서로 상반되는 무와 유(화는 유다)가 조화생성적 계사 이(而 - 말미암을 ‘이’는 ‘시천활동으로 말미암아로’ 생각한다.)로 연결되어 있다.(1) 

무형이유적’(無形而有迹)은 형상은 없으나 자취는 있다는 대구를 이룬다.(2)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에서는 서로 다른 차원인 나와 너로서 우리를 제시한다.(3)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는 여러가지 불연한 기운이 혼돈한데 도무지 한 기운이다고 한다.(4) 

‘지기’(至氣)는 비인격적 차원이고, 천주(天主)는 인격적 차원인데 주문에서는 함께 제시되고 있다.(5)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는 범주성을 가진 안과 밖을 말한다. 나 자체에서 안과 밖이고 다른 범주인 우리에서 안과 밖이기도 하다. 범주들은 근본은 같지만 서로 다른 차원으로 활동하는 시천이 있다.(6) 

각지불이(各知不移)는 낱낱인데 둘이 아니다고 한다.(7) 

‘수심정기’(守心正氣)에서는 결국은 상보적 관계에서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차원이라 할 심과 기과 함께 제시된다.(8) 

‘불연기연’(不然其然)은 그렇지 않다와 그렇다는 반대일치의 논리가 있다.(9) 

‘다시개벽’은 되먹임 대구를 이루고 있다.(10) 

 

수운은 논학문 13절에서 21자 주문을 풀이하면서 造化者 無爲而化也 ‘조화자는 무위이화다.’ 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 10가지를 ‘시천조화십’(侍天造化十)이라고 이름해 본다. 무위이화는 위 10가지를 동시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통시적으로 과정생성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천조화십은 우주창발, 조화 생성의 국면, 차원을 시점과 각도를 달리하여 다양하게 풀이하는 말이다. 모든 사건들, 생명활동, 사물의 변화 역동성 등은 ‘시천조화십’이다. 

 

이렇게 수운이 직접 밝힌 무위이화 풀이가 있음에도 무위이화는 왜 논쟁적인가? 

첫째는 시천(侍天)된 존재의 조화(생성)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해서 읽는 이마다 달라서다. 둘째는 얼핏 보기에 포덕문과 논학문에서의 무위이화의 맥락이 서로 달라 보이는 것에서 온다. 셋째는 수운의 말을 수운의 말로 풀기보다는 다른 학이나 글에서 근거를 가져오는 선입견으로 수운을 읽기 때문이다. 넷째는 수운의 무위이화, 무형이유적, 오심즉여심, 불연기연, 오심즉여심, 혼원지일기, 지기와 천주,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 불연기연, 다시개벽 등의 표현을 분별하여 따로따로 살펴서다. 시천된 존재의 조화과정의 다차원적인 표현을 동시적으로 통일적으로 살피지 않아서다. 다섯째는 수운이 최령자(最靈者)라고 표현한 사람과 비와 이슬 등의 자연현상이라는 범주의 차원이 있다. 범주의 차원이란 고등, 하등의 뜻이 아니라 시천조화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서두에서 이미 밝혔지만 무위이화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정리해 한 마디로 하면 이렇다. 무위이화는 시천한 자체자와 천(天)이 서로 감응하여 이루는 주체자의 자기생성 과정이다. 자체자(自體者)란 시천하였으나 모셔진 천이 활성화되지 않은 개체를 말한다. 주체자(主體者)란 천과 개체가 개체 내부에서 서로 감응하여 조화 즉 생성을 할 때 주체라 할 수 있다. 어떤 존재든지 자기차원의 생성을 하여 주체자가 되기에 순수한 자체자란 없다. 다만 개념상 필요해서 쓴다. 내유신령만하지 외유기화하지 않으면 조화정을 할 수 없다. 모든 개체들은 자기차원에서의 조화정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차원은 하등과 고등, 문명과 미개의 개념이 아니다. 돌도 자기 차원에서 우주적 조화생성에 참여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례지만 우라늄이라는 돌의 핵 폭발을 생각해보라. 히로시마, 체르노빌, 후쿠시마!  

 

천은 의도하나, 그렇지 않으나 모든 삼라만상에 이미 모셔졌다. 그래서 해월은 털벌레도 삼천도 한울이라 하였다. 모든 만물은 시천한 존재들이다. 사람은 다른  만물과는 달리 고도의 영과 기를 시천한 존재들이기에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은 천이 아닌 것, 천을 억압하는 것을 생성하시도 하고 그것들에 짓눌려 있기도 하다. 털벌레 삼천이 살생하는가? 아니다. 사람만이 그렇다. 하여 사람은 짓눌려 있는 천을 활성화하여 ‘천’을 주체의 다함으로 활성화하여야 한다. 천이 아닌 것, 천을 억압하는 것들이 함이 없도록 하는 것을 무위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흔히 어떤 일이 헛되게 되었을 때 무위로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의도를 나타날 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국주의를 무위하라. 원광대 총장인 박맹수 교수는 수운의 무위이화를 이런 것이라고 다시개벽지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무위이화란 천이 아닌 괴뢰주체에서 자기주체 생성을 하는 것이다.   

 

주체자의 자기생성이란 진화생물학식으로 말하면 ‘자발적 진화’라고 말할 수 있다.여기서 ‘자기’나 ‘자발’은 단독자나 고립자로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들은 우주적 얽힘의 과정생성에 있는 존재다. 시천하였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거나에 관계없이 모든 존재는 시천한 존재로서 자기생성력을 갖는다. 무위이화는 ‘저절로’라는 자동사가 아니다. 동학의 무위이화를 일부에서는 노자의 ‘도법자연’이나 ‘무위자연’과 같은 말로 오해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위이화는 동학이 아니고 노자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무위이화가 동경대전에 차지하는 무게는 크다. 수운의 무위이화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수심정기 – 시천활동을 필요로 한다. 수심정기가 없다면 수운의 무위이화는 도올이 말한 바의 노자의 ‘도법자연’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결코 아니다. 도올은 근원에 있어 수운의 수심정기를 부정함으로서 동학을 노자로 왜곡하고 있다. 

 

무위이화는 범주차원이 있다. 다윈 식으로 말하면 진화차원이 있다. 물리학으로 말하면 창발 차원이 있다. 진화나 창발은 하등에서 고등으로의 발전의 뜻이 아니라 어떤 주체들의 자기전개를 말한다. 자기전개는 모든 존재들에서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갖는다. 그 차원들이 서로 얽혀 전환이 일어난다. 산업문명에 가득한 혼돈한, 불연한 기운이 진화, 불연기연, 무위이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은 복잡계망에서, 우주의 그물에서 펼쳐진다. 천이란 우주 그물의 벼리다. 주체의 시천조화 활동이 참여하지만 범주가 달라지면 다른 차원의 범주 그 자체도 시천조화활동을 한다. 사회는 사람들의 얾힘망이지만 사람들의 시천조화 활동의 단순합이 아니라 사회 자체도 시천조화활동을 한다.  

각 범주의 활동이 있기에 내 의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원리가 있다. 태평양의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나비효과’는 동의하지만 나비효과는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고 소멸하기도 한다. 태풍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켈리포니아에서 날지 강릉에서 날지는 불연하다. 그러나 시천의 참여는 다른 차원 범주의 내용에, 속도에 분명한 작동을 한다. 동참할수록 불연은 기연해진다. 주체들은 방향을 가지되 수 많은 주체들의 의지들이 얽힌 결과물은 나라는 주체의 방향과 일치하지만은 않기에 방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포덕문의 무위이화를 심고한다. 때가 되면 보리가 익고 나락이 출렁거리고 꽃이 핀다. 포덕문에서 무위이화라는 말은 "함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함이 없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이성이 아닌 영성의 눈으로 보면 벼도 익을라고 발을 동동거린다. 바람도 맞고 햇빛도 받아야 한다. 모든 일이 어찌 함이 없이 되겠는가? 벼가 함이 없이 익는다면 벼는 자기주체물, 자기 생성물이 아니고 절대자 신의 종속물이다. 벼는 자기 안에 모셔진 천을 활성화하여 나락으로 출렁거린다. 올챙이가 개구리 되고, 애벌레가 나비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신령스럽다. 꼬물꼬물한 생명들이 햇빛과 땅 기운과 물이 있어(공간), 날이 차면(시간) 개구리가 되고 나비도 된다. 자체자 안의 영과 기가 활성화하여 다른 차원으로 전환될 때 신령스럽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전환도 신령스러운 과정이다. 아이의 포태도 신령한 것이다. 신령은 신비한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영(靈)과 기(氣)과 어떤 체(體)에 감응하는 것을 말한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될려면 어디서인가 기운이 와야 한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허고, 자동차는 기름을 먹어야 하고 로봇은 전기를 먹어야 한다. 천지만물이 모두 이 숨(기운, 에너지)을 먹어야 바뀌던지, 자라던지, 움직이던지 한다. 수운은 이를 대강자 기화(大降者 氣化)라고 한다. 나, 돌멩이, 풀, 나무, 올챙이가 함이 없어도 만물에 혼원지기가 있으니 ‘함이 없이도 시천한다’는 것이 무위다. 주체 입장에서는 기를 불러들이지 않아도 기가 조화생성의 근본으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위는 주체의 이화와 따로 놀 수 없다. 

 

이화는 주체의 적극적 활동이다. 주체 입장에서는 기화를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일단 기운이 내 몸에 깃들면 나는 함이 있어야 한다. 함이 있어야 온 몸에 가득한 혼원지기가 벼로, 보리로, 꽃으로, 비로, 이슬로 기연해진다. 우리 말 ‘기를 쓴다.’는 말이 이것이다. 이 과정을 기화(氣化)라고 한다. 기화는 ‘나다움’의 기연한 주체로서 아직은 나답지 않은 불연한 혼원지기를 나다운 기연한 주체로 조화생성하는 일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자기조직화, 자기생성, 자기창발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그래서 우주의 자기생성론, 자기창발, 자기조직화라고 이름할 수 있다. 무위이화는 이에 다름 아니다. 

포덕문의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천주조화지적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안다.」의 무위이화를 논학문의 무위이화와 견주어서 말해 보자. 이를 선천시대의 무위이화, 후천시대의 무위이화라고 달리 해석할 수 없다. 수운이 같은 말을 달리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위이화는 도올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그러하다’는 형이상학적인 애매한 말이 아니다. 천지만물은 자기주체와 자기생성을 가진 존재들이지 설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자율자동차가 아니다. 앞서 잠깐 말했지만 천지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천이 아닌 것들을 생성하고, 억압과 차별을 만든다. 사람만이 자기 욕망과 쾌락을 위해 반시천(反侍天) 문명을 만든다. 사람이 아닌 천지만물은 자기 범주에서 오염되지 않은 시천활동을 한다. 육식동물은 오로지 자기생명 유지를 위해 사냥을 하지 자기욕망과 쾌락을 위해 사냥하지 않는다. 

수운은 사람을 ‘최령자’最靈者라고 했다. 최령자이기에 거꾸로 ‘최악자’(最惡者)이기도 하다. 사람만이 천지만물을 대상화하고 사람까지 살생한다. 같은 동류를 살생하는 것은 사람뿐이다. 

천주조화지적은 수운 이전에도 있었다. 그 천도를 다시 발견한 것이 수운의 다시개벽이다. 그래서 사람은 시천된 존재이나 하늘이 억압된 상태에서 다시개벽하는 수심정기의 무위이화가 필요하고, 자연 상태의 다른 삼라만상은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시천된 존재 그대로 자기생성의 무위이화를 한다. 사람의 눈(영성적이지 못한)으로 비록 비와 이슬의 혜택이 근원에 있어 천주조화지적이란 것을 몰라도, 시천된 활동인 줄을 몰라도 지금 말로 표현하면 자기생성, 자기창발, 자기조직화를 한다는 것은 알았다는 뜻이다.

포덕문의 무위이화와 논학문의 무위이화는 범주의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소, 말, 진달래, 매화, 개망초 등에게 수심정기하라고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사람은 해월이 말한대로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다”(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라는 상태를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수심정기가 필요하다. 수운은 논학문 9절에서 분명하게 무위이화는 수심정기라고 한다. 수심정기 곧 무위이화함으로서 허상의 세계는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길이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인류는 지금 산업문명을 생명문명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에 왔다. 개벽운수가 도래했다. 무엇으로 수심정기하고 무위이화할 것인가? 허상을 물리치는 적극적 수심정기의 무위이화가 필요하다. 무위이화는 산업문명에서 생명문명으로 동학식으로 말하면 한울문명으로, 다시개벽하는 만사지(萬事知)라고 생각한다. 만사지란 모든 것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주체성을 다하여 문명전환 즉 다시개벽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 또한 무위이화다. 무위이화는 일체 만물을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파국을 무위하고 해방하는 서사다. 그것은 다시개벽  문명전환의 말이다. 마르크스의 혁명보다 더 큰 전환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도올의 말처럼 애매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세상에는 아프고 쓰러진 사람이 많다. 도올이 수운의 #무위이화를 "스스로 그러하다."며 노자의 도법자연과 같다고 말하면 숙명•운명적인 말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지배세력의 형이상학을 설파하는 권학(權學)이다. 하늘이 아닌 반생명, 억압, 불평등, 차별을 없애고(무위) 새 세상의 주인이 되라(이화)는 다시개벽의 언어다. 그것이 민학(民學)이요 생명학이다. 시천주란 삼라만상이 천주를 모시는 놈(시/천주)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하늘이신 님(시천/주)이다. 무위이화란 관념의 독재자 신을 무위하고 우주적 일체자의 산(生)신을 주체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 글은 토론에 따라 수정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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