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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칼럼 005]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김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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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불혹을 지나고 있다. 미혹되지 않는다고 하여 불혹인데,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것이 나를 여전히 미혹하는데, 몸은 예전과 같이 않다는 걸 느낀다. 정신은 그대로인데 몸만 나이를 드는 것 같아서 불만족스럽다. 이런 느낌이 들 때면, 인생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를 생각하게 된다. 나로 시작한 생각은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것이 되었다가, 다시 이렇게 바뀐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철학과 종교의 근본적인 기원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작은 뇌로 그 자신보다 무한대의 우주에서부터 무한소의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인식의 범위를 끝도 없이 확장해 온 정말 신비롭고 대단한 존재지만, 구체적인 사실로 밝혀내기 어려운 주제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내가 자문할 때마다, 그 답은 언제나 오리무중이다. 나의, 혹은 인간의 근원을 생각하기는 커녕 이미 나의 현재 작은 고민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실상이다.

답은 없지만 생각이 들때마다 여러가지 각도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티끌 같은 가능성이 실현되면서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그 이후 우주가 끝없이 확장하고, 흩뿌려진 일부가 원소들이 다시 태양과 같은 별을 이루고, 그 태양과 절묘한 거리(골디락스존, 액체로 존재하는 물이 증발해 버리거나 얼음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에서 지구가 형성되고, 생명이 발생하고, 진화하고, 인간이 나타나고, 생존에 성공하면서 무리를 이루고, 기술을 발전시켜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작은 원인이 중요한 결과를 유발한다는 것을 표현할 때 1972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가 처음으로 발표한 나비 효과라는 말을 많은 사용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 건너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데, 내가 지금 여기에 현재의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얼마나 많은 나비효과가 거듭 현실화 되어서 이루어진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동학 천도교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한울님을 만난 후에 “억조창생 많은 사람 내가 어찌 높았으며 일(一)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라고 하셨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설 보는 것을 좋아한다. 웹플랫폼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종류 가리지 않고 다 보는데, 요즘유행하는 설정 중 하나가 인생 회귀다.(현재 공중파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도 웹소설 원작의 회귀물이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용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만일 나의 인생을 다시 산다면 그 때의 인생은 설사 지금과 똑같이 살고 싶어도 지금과는 180도 달라져 있을 거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비가 날갯짓 한번 한다고 태풍이 몰아치는데 인생에서야 누가 재채기만 한 번 더하고 덜해도 더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내가, 그리고 내 옆의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그런 점에서 처음 던졌던 질문의 답은 명백하게 밝혀낼 수 없겠지만 ‘정답’을 찾지 못한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가 지금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궁구하게 되는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보자. 그 과정에서 질문에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종교는 사람의 신념과 가치관 등에 영향을 주고, 내 살아있는 동안의 삶의 이후에 대해서까지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 인생을 계산할 수 없는 가능성의 결과물로 보고 싶지 않거나 과학적인 답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때 결국 종교를 찾게 되는 것이고, 공부가 깊거나 체험을 통해 그 해답 또는 해답으로 가는 길을 본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내 경우에 비추어 보면 종교도 가능성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스스로 이 종교를 해야겠다라고 자기가 신앙할 종교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종교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내가 지금 가진 종교의 종교인이 된 것은 위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의 답을 찾는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나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종교를 물려받았다. 이것은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내 이름을 받은 것처럼, 말하자면 선천적으로 받은 것이다. 나의 아버님은 지금도 무종교인이시고, 외가 쪽이 종교를 믿는 집안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특정 종교를 접하고 종교인이 되었다 만약 외가 쪽의 영향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종교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가 그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본질에 대한 것이건, 단편적인 어려움에 대한 것이건, 삶에 대한 고민을 할 때도, 나에게 위안과 도움을 주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그래서 더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그 마음이 깊지 않고 현실생활에 쫓기기 때문에 항상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이제부터 내가 글을 써보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에서 기인한다. 일상의 반복을 벗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 정하여 노력해서 하다 보면 내가 삶을 사는 의미에 대해서를 조금 더 의미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보다 깊은 의미에서 종교를 신앙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작은 화두를 던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정말 크고 깊은 우주의 진실에는 다가가기 어려울지라도, 내가 의식적으로 다가가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고, 그 과정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혼자가 아니라면, 더 의미가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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