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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강좌 006] 동학의 21자 주문과 현대과학 / 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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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6월 8일 전남 광주 소재 사단법인 ‘광주평화포럼’에서 강의한 원고입니다. 이 글로 동경대전 강좌 6회를 대신합니다. 

 

동학의 21자 주문과 현대과학

 

1. 생각의 지도 – 과학과 미신(비과학), 주문(呪文) 

 

2.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 구조

 

3. 수운의 논리 구조 

 

4. 통일론 21자 주문의 과학

   4-1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란? 

   4-2 강령(降靈), 시천(侍天), 조화정(造化定) 

 

5. 무궁한 시천(侍天)으로 만사지(萬事知) 

                            - 새문명의 창발

 

 

 동학의 21자 주문과 현대과학

                              

                          - 전주동학혁명기념관 부설 동학연구소 소장 강주영 -

 

  1. 생각의 지도 – 과학과 미신(비과학), 주문(呪文) 

 

  과학에 혁명이 있는가? 과학이란 실험되고 검증된 진리인데 그것이 그 자체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하다니. 그렇다면 이전까지 과학이라고 부른 것은 과학이 아니고 미신 즉 비과학이었던가? 주문(呪文)그러면 신비라기보다는 미신(비과학)적인 주술로 들린다. 한국에서 달은 좌우로 뜨고 적도에서는 상하로 뜬다. 생각의 지도가 다르다. 무엇이 과학이고 미신인가?

 

  지동설이 밝혀지기 전에는 미신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증명되기 전에는 창조론에 불경한 미신이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이 나와서 뉴턴역학은 한계에 부딪혔다. 토머스 쿤(19922~1996)은 기틀(paradigm, 『과학혁명의 구조』, 1962)을 제시하여 어떤 과학적 원리는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진화해간다는 믿음을 가진 과학에 충격을 주었다. 미신(비과학)과 과학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17세기 말, 뉴튼은 태양계 안의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뉴튼의 중력법칙과 운동법칙, 미적분을 사용하여 정밀하게 수학적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뉴튼스타일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그 패러다임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쿤은 이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불렀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에서 변칙사례들이 많이 나오면 저절로 과학혁명을 불러일으키는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과학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쿤은 정상적인 과학연구의 목적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활동이란 기존의 패러다임이란 범위안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이런 식의 독단성이 과학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패러다임이 만들어진 후에는 무엇을 새로 발견할 수 있을지 그 패러다임이 지시해주고 이에 따라 패러다임에 맞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반대로 패러다임에 맞지 않은 우연한 발견이 생기는 경우에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보호하기 위해 임시방편적 가설 등을 동원하여 방어하고자 한다. 쿤은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것을 반증하며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그것을 또한 반증을 하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던 칼 포퍼(1902~1994)의 반증과학(falsify science)과는 상반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이라는 말이 있다. 과학인데 어떻게 혁명이 가능한가? 뉴튼 패러다임은 혁명을 두 번 겪었다. 한 번은 아인쉬타인이 절대시간이나 공간은 없고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정의되는 상대성이론에 의해서였다. 뉴튼은 각 물체의 질량이 불변하다고 봤는데 아인슈타인은 질량은 속도에 따라 변하고 질량과 에너지는 상호 환원될 수 있다고 봤다. 양자역학 시대에 와서는 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내용보다도 더 해괴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말한다. 뉴튼 역학에서는 뉴튼 법칙에 의해서 모든 물리적 과정의 결과가 정확히 예측된다고 했다. 양자역학에서는 여러 가지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 정해져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로서 종래의 필연적 인과론은 확률적 인과론으로 혁명을 겪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과학’인지 말하기 어렵게 된다. 

 

  과학과 비과학(미신)의 경계는 불확실하다. 동학의 말로 하면 불연기연하다. 야뢰 이돈화는 불연기연을 반대일치의 논리라고 불렀다. 김지하는 ‘그렇다’,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연기연을 카오스모스 – 혼돈의 질서라고 불렀다. 물리학의 복잡계이론에서는 창발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동학의 말로 하면 불연기연의 경계에서 조화(造化 - 생성)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창발은 무엇인가를 통째로 새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것을 계승하되 이전의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 진화(진화(evolution)는 발전의 뜻이 아니라 자기 전개(unfolding)를 말한다. 생명은 단백질에서 왔지만 단백질을 생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부분(요소)의 합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 범주가 달라지면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이다는 말로 설명된다.

 

  이 말은 서양의 사고를 지배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률, 배중률, 동일률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참은 참이다”는 동일률,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률,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하여야 한다.”가 배중률이다. 변증법은 참과 거짓의 양단 중에서 하나가 이겨서 지배하는 것인데 이것을 한국말로는 ‘정반합’이라고 한다.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생철학』의 저자 윤노빈은 변증법을 “분리하고 지배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헤겔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모순률을 인정하여 하나의 사물을 대립하는 두가지 규정의 속성을 가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고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벗어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한 사물에 있는 A(정)와 B(반)가 상호 투쟁하여 C(합)로 간다고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모순이기에 서로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변화가 생겨 A도 B도 아닌 다른 것인 C로 간다고 하여도 그것은 A와 B 어느 한쪽의 속성이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 과정에 흘리는 피는 불가피하다고 하여 ‘이성의 간계’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사적 소유와 사회적 노동의 모순이 충돌하여 사회는 다른 사회로 이행한다고 하였다. 자본과 노동이 싸워 노동이 이겼다고 하자. 노동자 승리의 세상은 결국 주인만 달라진 노동 세계일 뿐이다. 그게 자본제보다 더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도 있지만 문명의 전환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모순이 없는가? 결국은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인민들을 속도전과 영구혁명으로 내몬다. 혁명을 한 체제가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된다. 

  2.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 구조

 

  아래에서 국면은 단계적 발전의 의미는 아니다. 각 국면은 동시적이고 통시적이며 통일적이다. 편의상 나눈 것이다.

 1국면 불연기연 :사물의 근본을 추론하는 불연기연

  ∙기연여기연 불연우불연 其然如其然 不然于不然 

  ∙그렇다고 여기니 그렇고, 그렇지 않으니 그렇지 않다.

  예시)나의 부모(근본)의 부모(근본)의 부모(근본)을 추론할 수 있어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맨 처음 부모(근본)는도대체 어찌하여 있는가 생각하니 부모(근본)의 부모(근본)의 부모(근본)란 말도 그렇지 않다.

 

  2국면 불연기연: 사물의 근본을 추론하는 추론의 혼돈성 

  ∙ 부지불연 불왈불연 지기연 시기연 不知不然 不曰不然 知其然 恃其然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 수 없으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 

  예시)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없으므로 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란 것으로 그러니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 

 

  3국면 불연기연: 불연기연으로 통일성을 형성 

  ∙불연불연 우불연 기연기연 우기연 不然不然 又不然 其然其然 又其然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으니 또 그렇지 않고, 그렇고 그러니 또 그렇다. 

  예시) 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어서 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고, 또 맨 처음 부모(근본)가 아니고, (맨 처음 근본이 아니란 것으로)( 근본이 아니란 것으로) 그렇고 그러니 또 그렇다.  

 

  위 불연기연의 관점에서는 정형화된 패러다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정상과학이나 칼 포퍼의 반증과학도 그 근본에서 ‘통일성’, ‘일원성’을 놓치고 있다. 불연은 동시에 기연이고 기연은 동시에 불연이고 이 둘은 되먹임 고리에서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다. 오래된 말로는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이다.”(역설의 논리 패러독스 paradox ) 이 역설과 되먹임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변증법, 쿤과 포퍼의 정상과학과 반증과학과는 다르다.  이들의 논리는 사물과 우주의 통일론으로서 적합하지 않고 요소와 부분에 머물고 있다. 이들에게 세계는 여전히 기계 요소의 진화다. 되먹임은 물리학에서는 프렉탈(fractal)이론이다.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다. 즉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의 리아스식 해안선, 동물혈관 분포형태, 나뭇가지 모양, 창문에 성에가 자라는 모습, 산맥의 모습도 모두 프렉탈이며, 우주의 모든 것이 결국은 프렉탈 구조로 되어 있다. 불연기연의 되먹임론은 자기조직화와 자기창발의 원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지며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한다는 자명한 자연현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논리적 근거”라고 하였다. 뉴튼과 갈릴레오는 서로 작용하는 중력(떨어지고, 잡아당기고, 밀어내고), 나무가 물에 뜨는 것은 부력의 속성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 주 초점은 대상 자체이며 대상과 연계된 외부의 힘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동(東)에서는 그것은 상호작용의 통일장 안에 있다는 것을 뉴튼, 갈릴레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같은 나무라도 이쪽에서는 하나의 연속적인 물질이지만 저쪽에서는 미세한 입자들의 결합이다. 

 

 

  3. 수운의 논리 구조 

 

  수운은 21자 주문에서 통일장 관점을 탁월하게 실현하고 있다. 수운의 문장은 대구와 역설의 통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모순률이다. 1장의 정상과학, 반증과학, 패러다임, 부분과 전체, 과학과 미신을 기억하면서 논의하자. 과학이란 자연과학할 때의 과학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는 것을 과학이라 한다. 수학, 철학, 의학, 공학, 종교 모두 다 과학이다. 각기 자기 차원과 자기 범주에서 진리를 구한다. 명상도 과학이다.   

 

  󰋎무위이화(無爲而化) :서로 대립되는 무(無)와 유(有)가 동시, 통시 활동 계사 이而로 통일되어 있다.

  󰋏 수심정기(守心正氣): 서로 다른 차원의 심과 기가 함께 제시되고 있다 

  󰋐 불연기연(不然其然): 그렇지 않다와 그렇다 반대일치의 논리 

  󰋑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나와 너로서 우리 모두를 제시한다.

  󰋒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 안과 밖, 령과 기가 함께 제시된다. 

  󰋓지기(至氣), 천주(天主) :비인격적 차원 ‘지기’와 인격적 차원 ‘ᄒᆞᄂᆞᆯ님’이 함께 제시된다. 

  󰋔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분별할 수 없는(불연한) 혼돈한 것인데 한 기운이다.

  󰋕다시개벽 :되먹임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수운의 문장 논법, 반대일치의 논리를 분별적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 통일론으로 사유해야 한다. 통일론은 물리학에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4가지 힘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같은 근원에서 시작했다는 물리학 이론이다. 수운의 문장은 공간적 시간적 동일성의 동시성과 시간의 순환에서의 통시성을 통일적으로 사유한다.  

 

  병이 나면 서(西)의학에서는 선택과 집중으로 도려내는 수술과 약물을 투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하다. 참이 아니면 거짓이기에 의학의 눈으로 거짓을 도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동(東)의학에서는 부분으로 전체를 살리고 전체로서 부분을 살리기도 한다. 참이면서 거짓이고 거짓이면서 참이기도 하다.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위장만 치료하지는 않는다. 대체적으로 서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동의학은 ‘역설의 논리’에 충실하다.

 

  과정철학의 거두인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유명한 것이 모순률, 동일률, 배중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과 다르게 동양에서는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이다”는 역설의 논리 패러독스(pardaox)가 있다.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 대표적인 역설의 논리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변증법을 적용하면 “진보는 진보이면서 보수일 수 없다.”, “진보이든지 보수여야 한다.” 이 논리에서는 진보와 보수는 서로 이율배반이기에 양립할 수 없어 싸워야만 한다. 부분은 부분(요소)이어야지, 전체일 수 없고 전체는 전체이어야지 부분일 수 없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요소)의 합이다. 이것이 기계론, 요소론이다. 변증법은 기계론과 요소론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다.

 

  

  4. 통일론 21자 주문의 과학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수운은 21자 주문에서 통일론을 탁월하게 실현하고 있다. 수운의 문장은 대구와 역설의 통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모순률이다. 앞에서 말한 정상과학, 반증과학, 패러다임, 불연기연의 논리, 되먹임, 통일장, 역설의 논리 등을 통해 동학 21자 주문을 사유해보자.

 우리의 눈은 세 개다. 어째서 세 개인가? 감각의 눈(경험의 눈), 마음(心)의 눈(이성의 눈), 영(靈)의 눈(통일장의 눈)이 있다. 초월이란 감각의 눈, 이성의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불연한 눈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나와 동떨어진 옥경대에 계신 상제(인격적 차원)의 눈이 아니라 나에게 분명히 있으나 내가 아직 만사지(만사지萬事知) 하지 못한 눈이다. 초월성도 내게 있는 것이다. 아직 불연할 뿐이다. 수운은 감각, 이성, 영성, 비인격적 차원, 인격적 차원을 통일해서 말하고 있다.

 

 

    4-1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란? 

 

  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란 “우주의 4가지 힘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통일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만인만물은 기를 가지고 있다. 이 기운으로 생명이 활동하고 만물이 생성된다. 이 기는 모두와 모든 것들과 동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평양의 나비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말이 그 말이다. 수운은 이것을 ‘기자허령창창 무사불섭 무사불명’(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이라고 한다. 천도교는 이 문장을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하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간섭과 명령을 전지전능한 신의 독재(?)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동경대전 전체의 맥락 뿐 아니라 21자 주문의 맥락으로 보더라도 상호연관성의 조화(造化, 생성) 과정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무사불섭 무사불명의 주체는 천이 아니라 ‘기자’라는 존재(것? 존재는 인격 비인격 모두에게 해당합니다.)다. 기가 천의 본질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동학에서 천은 만인만물에 내재한 것이다. 그래서 오심즉여심이다. ‘허령창창’은 ‘온 우주에 가득하다’고 풀면 쉽다. 한자어 섭涉은 ‘간섭, 참견’이라기 보다는 ‘도움’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혜강 최한기(1803~1877)는 기(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라 하였다. 천하는 한 덩어리의 살아 있는 것 즉 일단활물(一團活物)이다. ‘기’는 우주 유기체론의 핵심이다. ‘기’는 숨소리이다. 숨소리는 생명체가 살아있음이요. 식물은 광합성이요. 들의 안개는 들의 숨소리, 타 버린 재와 돌과 흙에도 생명의 기운이 정(靜)의 형태로 있다고 보았다. 시간과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활동운화함으로서 기의 형상이 변하니 시간이 있음을 알겠고, 형상이 보이는 곳이 있으니 공간이 있다. 시간과 공간도 서로 유기체이다. 동학은 기화(氣化)라고 하였다. 거기에 우주가 있다.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분위기(雰圍氣) 좋네.''분위기 썰렁하네 ' 이때 기氣는 무엇일까요. 성리학뿐 아니라 동학에서도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천天, 리理, 기氣다. 모두 비인격적 차원이다. 천이 인격적 차원을 획득하면 천주(天主 ᄒᆞᄂᆞᆯ님)가 된다. 여기서 "천은 천벌 받을 놈"할 때의 그 천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학의 ᄒᆞᄂᆞᆯ님은 천벌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다.

 

  '리'는 "그럴 리(理)" 없다의 그 '리'다. 기와 리는 '한덩어리, 한울타리'(동학)여서 따로 국밥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한덩어리가 ᄒᆞᄂᆞᆯ이다. 성리학에서는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라고 한다. 이 기와 리의 덩어리를 태극기 할 때의 '태극'이라고도 한다.

 

  '분위기' 에서는 표현은 기이지만 한덩어리의 ‘리기’다. 리는 기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말도 있다. 분위기는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 특정한 사람과 사물이 뿜는 하늘하는 상태('하늘하다'는 동사다.) 또는 '이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해월은 천지이기(天地理氣), 천지부모라고 하였다.

 

  분위기는 느낌 즉 감각 또는 경험으로 와 닿는 것인지?  서양에서는 이런 것을 경험주의철학이라고 한다. 분위기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특정한 사람과 물건들이 뿜는 어떤 기운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지는 기운인지? 그렇다면 그 기운은 감각 또는 경험이 아니라 썰렁하든 황홀하든 엄숙하든 새로운 기운을 창발하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동기화 또는 공명, 공감, 공진이다. 이때 누구인가가 그 분위기를 바꾼다면 그는 조화자(造化者)자가 된다. 그 조화자는 김제동의 재미난 말(기운)일 수도, 선동가의 열기일 수도 있겠고, 히틀러가 만든 군중심리일 수도 있다. 

 

  수학에서 ‘평행선 공리’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와 만나지 않는 직선을 단 하나 그을 수 있다”라고 한다. 공리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믿는다. 불연하지만 기연하다. 수학은 이 공리를 전제로 다른 많은 공식들을 만들어 낸다. 리기도 수학의 공리처럼 그런 것은 아닐까?.

 

  리는 "그럴 리 없다"의 리이고 "분위기 좋다" 할 때의 기, "활기 있다" 할 때의 기라고 쉽게 생각해본다. 기를 성리학에서는 형상의 질료라고도 한다. 빛은 형상은 없으나 입자와 파동이라고 물리학은 말한다.(양자 중첩성, 양자 얽힘)한다. 양자(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얽힘 상태란 입자들은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양자 상태가 함께 더해질 수 있으며(중첩) 결과는 또 다른 유효한 양자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한다. 양자 상태는 둘 이상의 다른 별개 상태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다만 사람의 눈에 빛의 입자가 보이지 않을 뿐이지 형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빛의 입자와 파동에서 파동은 내 가슴을 흔들고 입자는 심장에 박힌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으면 침묵하자." 고 했다고 한다. 이는 서양 철학이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했다는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동학에서는 ‘한 기운’, ‘한 덩어리’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논학문 12절의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가 대표적인 표현이다. 현대과학이 암흑물질이 있음을 알지만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우주의 26.8%는 암흑 물질이다. 보통의 물질은 4.9% 정도이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대부분은 암흑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나머지 68.3%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에너지인데 암흑 에너지라고 부른다.

 

 

    4-2 강령(降靈), 시천(侍天), 조화정(造化定) 

  대강(大降)이란 기화(氣化)를 원하는 것이라고 논학문 12절에서 수운은 말한다. ‘기’는 비인격적 요소의 ‘것’으로서 어떤 주체에 있는 영이 사건과 생성의 실체로서 드러나는 것을 기화라고 하며 이를 ‘강’(내릴 강降)이라고 한다. 여기서 영과 기는 하나의 두 차원이다. 영과 기는 통일체지 서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다. 빛의 입자와 파동을 말할 때 기가 입자라면 영은 파동이다. 돌도 기와 영이 있다. 즉 돌도 파동과 입자가 있으며 우주적 조화 생성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돌도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우주적 조화 생성에 참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강령(降靈)이라는 것은 내게 없는 영이 밖으로부터 와서 내게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모셔진 영이 기화하는 것이라고 수운은 분명하게 “대강자 기화지원야大降者 氣化之願也”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천이란 주체의 밖에서 모셔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체가 생성될 때 근원적으로 주체의 질로서 ‘영’이 모셔졌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영’이라는 것은 이성, 감성, 감정, 신령스러움, 영성 등등으로 분별하여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앞서 말한 세 개의 눈이 통일된 것으로서의 영이다. 

 

  ‘기란 것은 조화의 원체 근본’(氣者造化之元體根本也 -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이라고 해월은 말한다. 이미 모든 존재들은 자기 몸 안에 근원적으로 ‘영’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존재가 생성되는 그 순간 ‘영’을 가지고서 난다. 해월은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다”(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고 한다. 영은 기의 활성화 상태다.

 

  영과 기는 존재자의 고유 속성이면서도 영과 기 그 자체는 비인격적 존재다. 그런데 이 영과 기는 부분 요소가 아니라 존재와 그 자체의 근본이다. 영 자체는 아직 무엇 무엇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기불로(玄機不露 동경대전 탄도유심급) 즉 불연(不然)한 상태다. 이 영이 바탕 자체에 응하여 체(존재)를 이루며 드러나는 조화생성과정이 기화(氣化)다. 불연한 영이 기화하는 과정이 불연기연이고, 무위이화이며 우주 창발의 원리다. 창발(創發 - 다른 차원으로 떠오름)이란 완전히 새롭게 어떤 것을 만드는 창조가 아니다. 이전의 우주를 계승하되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이 조화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물리학 복잡계 이론에서 창발은 혼돈의 가장자리 즉 불연과 기연의 경계에서 일어난다. 유기물 생명은 단백질에서 왔지만 그 생명은 단백질과 질적으로 다르다. 생명은 영과 기를 단백질과 다른 범주 차원에서 조화생성한 것이다. 생명은 단백질로 환원하거나 단백질이라는 요소로 분해할 수 없다.  

 ‘기’는 모실 시(侍) 풀이의 ‘내유신령 외유기화’때문에 주체자, 자체자의 바깥으로 오해하기 쉽다. 모든 사건, 존재는 이미 강령된 존재 즉 내유신령한 존재로서 존재자체에서 기화가 일어난다. 내와 외는 한 존재자체에서 영과 기의 관계다. 영과 기가 통합되고 일체화됨으로서 조화생성을 한다. 동학의 여러 글들에서는 영(靈)이 아주 많이 표현된다. 

 

 이 ‘영’에 대해서는 의암 손병희의 글을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우주는 원래 영의 표현이다...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 문득 영성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영의 결정으로써 만물의 조직을 낳았다. 만물의 조직으로써 다시 영의 표현이 생겼다. 그러므로 영과 세상은 같은 이치의 두 측면일 따름이다. 대신사(수운)가 일찍이 주문의 뜻을 풀어 말하기를 「모신 것이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영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인 정의를 도파한 것이다...사람은 이에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자로 만기만상의 이치를 모두 한몸에 갖추었다. 사람의 성령은 이 대우주의 영성을 순연히 타고난 것임과 동시에 만고억조의 영성은 오직 하나의 계통으로서 이 세상의 사회적 정신이 된 것이다.” ” - 의암성사법설 성령출세설, 한자원문 생략 -

 

  의암은 ‘영’을 어떤 주체자, 자체자, 것(물건)들과 동떨어진 알 수 없이 신비로운 그 어떤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영은 기화하는 실체자다.영은 기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는 비인격적 차원이다. 영과 기는 하나의 두 측면이다. 전체가 부분을 품고 부분은 전체를 품는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다. 부분의 합을 전체라고 하는 것을 요소론 또는 기계론이라고 한다. 손병희는 “영과 기운이 본래 둘이 아니요 도시 한 기운이다.”-의암성사법설 강론경의-라고 한다. 앞서 해월도 “천지, 음양, 일월, 천만물의 화생한 이치가 한 이치기운의 조화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 나누어 말하면 기란 것은 천지 귀신 조화 현묘를 총칭한 이름이니 도시 한 기운이니라.”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고 한다. 

 

  동학의 주문은 비인격적 요소와 인격적 요소를 통일한다. 상제, 귀신, 천주, 하늘님, ᄒᆞᄂᆞᆯ님, 하느님 등은 인격적 요소다. 그런데 수운은 양학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다고 한다. 기(氣), 무(無), 도(道), 법(法), 이(理) 등은 비인격적 요소인데 서양신에는 이런 비인격적 요소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한국에서 유불도는 비인격적 요소가 확대되어 왔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이, 기라는 비인격적 요소가 강화되어 왔다. 수운은 인격과 비인격을 21자 주문에서 이원론을 분리할 수 없는 일원으로 통합한다. 서양에서는 반대로 인격신만 강조되어 왔다. 그런데 니이체는 그 인격신의 사망을 선포해버린다. 근대이성의 손을 들고 독재자 신성을 타파해버린다. 

 

  모든 존재들은 이미 시천한 상태다. 시천하지 않으면 존재가 창발될 수 없다. 그런데 시천이 조화정에 이르려면 기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문을 한다. 주문을, 주문수련을 한다는 것은 주문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끝 없는 사유를 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동학을 ‘믿는다고’가 아니라 ‘한다는 것’은 주문을 한다는 것이고, 주문을 하는 것은 시천을 하는 것이고 시천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시천활동이자 만일만물을 시천하게 하는 일, 즉 우주적 조화생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5. 무궁한 시천(侍天)으로 만사지(萬事知) 

     - 새문명의 창발

 

  시천주(侍天主)할 때의 시천주가 시천/주인지, 시/천주인지 참 논쟁적이다. 필자는 시천/주라고 여긴다. ᄒᆞᄂᆞᆯ 같은 님이지, ᄒᆞᄂᆞᆯ에 인격적 존재 님이 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운은 ‘천’을 따로이 설명하지 않았다고 본다. 주문의 영세불망이란 다른 뜻이 아니다. 잊지 않고 무궁한 시천활동을 하라는 것이다. 만사지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으나, 즉 내유신령하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옥경대에 있는 신의 독재에 당하거나, 그릇된 허무지설의 지배에 당하지 말고, 괴뢰주체에서 벗어나 자기주체, 자기생성, 자기통치로서 우주적 조화생성에 참여하라는 말이다. 

 

  수운은 “나는 도시 믿지 말고 ᄒᆞᄂᆞᆯ님을 믿어스라.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용담유사 교훈가),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玉京臺)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용담유사 도덕가)

 

  수운의 이 말은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문명전환 즉 다시개벽(용담유사 안심가)을 요구하는 말이다. 혁명은 다시개벽의 하위범주다. 쿤의 말로는 넓은 뜻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현대철학, 사상의 과제는 6차 생물대멸종, 기후위기, 불평등과 억압, 문명우울증(자살, 공황장애, 팬데믹 같은 자연의 역습)에 대응하는 것이다. 멸종 또는 파국이라지만 지구에게는 거대한 6차 전환이고, 현생 문명의 파국일 뿐이다. 특이점은 5차까지는 우주와 지구 자체의 순환이었다면 6차는 인류가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6차 생물대멸종과 기후위기는 우주 자연 지구의 되먹임 과정이다. 멸종, 파국보다는 ‘거대한 전환’으로 불러야 맞다. 거대한 전환이라는 말은 기성 지배 세력에게는 위협적인 말이므로 그들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지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 자연과 현생 문명이 다른 생태와 문명으로 6번째 이동하는 것이다. 전환의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임계점을 지났는지도 모른다. 역사가 앞으로만 나간다는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직선인 앞이 아니라 되먹임의 거대한 전환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곤혼스러움이 있다. 지금까지의 것이 그대로 다른 것으로 진보 또는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파국과 종말을 동반한 거대한 전환이라니!

 

  전환을 한국말로 하면 ‘다시개벽’이다. 지금 전환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종(種)들과 현생문명의 전환을 준비하는 것이다. 인류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수운이 말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비밀이기도 하다. 수운의 무위이화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해석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무위이화는 나와 동떨어진 천명이나 신으로 부르던 것의 간섭이 없는 존재 자체의 스스로의 자기조직화와 되먹임, 물리학에서 말하는 프렉탈(fractal) 같은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 아무리 개입해도 지구는 자기 길을 간다. 유일한 길은 지구의 자기조직화에 인간들이 순응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과 생성의 주체는 생명 그 자체지 생명 밖의 신, 천명, 국가, 화폐, 사회계약 이런 것이 아니다. 지구자연을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면 지구는 인간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을망정 자기조직화의 길을 간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무위이화는 주체 밖의 다른 주체들과 상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도 자기 조직화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생명 스스로의 자기조직화 질서를 말한다. 때문에 무위는 인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의 길과 어긋난 인위를 적극적으로 없애는 유위(有爲)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무위가 유위’라는 역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자기는 범주가 있다. 사실 만인만물이 서로 상보적이어서 ‘자기’라는 범주를 말하기가 얼벼다.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 개인, 가족, 동아리, 사회, 생물계, 동물계 이 모두 그 법주 내에서 자기다. 

 

  변증법이 현생문명의 파국을 막으며 거대한 지구의 전환에 대응할 수 있을까? 지금 이 파국에 대비한 주인공들은 부르주아지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탄소중립성에 의심이 있지만 일단 인정하다 하더라도 태양광과 전기차의 주인공은 부르주아지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종이컵 안 쓰고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고, 최대한 플라스틱 사용을 억제하지만 사실은 이 전환에서 주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비주도성과 주도성은 불연기연한 관계여서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다. 파국에 대응하는 준비는 부르주아지가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파국 대응책이 거대한 전환 준비가 아니고 기술력으로 환경과 생태를 관리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지구의 순환을 기술력으로 관리 가능할까?

 

  양비론을 공격하는 이들은 역설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충실하다. A, B, D, C…,Z 다수 중에(양비의 양은 둘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만 옳다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인 역설의 논리에서는 A~Z가 모두 옳기도 하고 동시에 틀리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접(包接)한다. 맞다 동학의 그 포접이다. 역설의 논리가 드러난 동학의 사고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불연기연(不然其然), 오심즉여심을 손병희가 해석한 인내천(人乃天) 등이 역설의 논리다. 여기서는 스스로의 존재가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하고 창발한다. 없는데 무엇인가 된다의 무위이화는 무와 유의 공존, ‘내가 곧 너고 네가 곧 나다’의 오심즉여심, ‘그렇지 않다’의 불연과 ‘그렇다’의 기연 즉 반대일치의 논리인 불연기연, 하늘(하늘을 영어의 신God로 해석하지 말기를)이자 곧 사람이며 사람이자 하늘인 인내천은 다 역설의 논리다. 

 

  진보이면서 보수이고, 보수이면서 진보다. 그런데 사실은 진보와 보수는 논리적으로 구분이 어렵다.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모두 다 진보다. 경제발전 이윤 동기만을 중시하는 보수진보와 분배를 더 중시하는 급진 진보로 불러야 마땅하다. 근대에 만일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기획에 의한 것이다. 진보라는 말을 쓰는 한 결코 부르주아지를 포접해서 포월(包越)할 수 없다.

 

  수운의 무위이화와 같은 “A이면서 B이고, B이면서 A다”는 역설의 논리를 컴퓨터에 적용한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는가? 컴퓨터는 and, or, if then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수운의 불연(숨은질서, 그렇지 않다)과 기연(드러난 질서, 그렇다)을 컴퓨터는 다룰 수 있는가? 카오스이론은 수운의 불연기연을 증명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는 것은 반대일치의 논리 즉 수운의 불연기연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깬 것이다. 불연기연은 상보성, 유기체성의 원리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중첩성의 원리가 컴퓨터 논리에 적용된 것이 Qubit다. 양자컴퓨터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역설의 진리, 반대일치의 논리가 수학으로도 표현가능하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무색하게 하였다. 수운의 동학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데카르트와 뉴턴을 논파하고 있었다. 여기서 ‘역설의 논리’가 ‘양자 중첩성의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 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의 주류 논리는 단적으로 사람과 자연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윤을 만드는 요소였지, 주체생성자가 아니었다. 자본제 노동은 주체생성자의 지위를 만들 수 없다. 기존의 국가사회주의 역시 당과 국가를 앞세웠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돌아가셨다’, ‘환원하셨다’, ‘소천하셨다’고 한다. 아사달에 내려와 도읍한 환인은 아사달에서 신선이 되었다. 나뭇꾼과 선녀에서 선녀는 하늘로 갔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살다가 자신이 산 곳으로 되돌아가는 자기 되먹임의 자기조직화는 앞에서 말한대로 생명의 본질이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프렉탈’, ‘자기조직화’, ‘되먹임 현상’을 한국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기조직화의 순환을 통해 우주는 전환한다. 아주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계승한 근대의 기틀(paradigm)은 전환 가능한가?

진실은 간단하고, 허구는 긴 말을 필요로 한다. 답은 간단하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인정해서 거대한 전환을 준비하는 일이 지금 철학 또는 사상의 임무다. 이 전환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생태계다. 태양광이나 전기차로 종말을 피할 수 없다. 미사일 한 방 쏘면 헛것이 되고 만다. 7차 지구와 현생 호모사피엔스의 평화로운 되먹임고리를 최대한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두 생산력 진보를 핵심으로 삼았고,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수탈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것은 요소들의 합을 전체로 본 데카르트 기계론의 필연적 귀결이다. 본디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고 요소화한 것이다. 근대는 비인격적 요소가 인격적 요소들을 지배했다. 그래서 무력하기만 하고 쓸모도 없는 인격적 신의 죽음을 니체는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대안을 말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근대 인간들은 주식회사라는 비인격적인 물격에 인격을 부여한 법인을 만들고 법인의 지배하에 인간을 노동력이라는 비인격적 요소로 전락시켰다. 국가사회주의도 자연과 분리된 인간 노동력을 동원하는 체계였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지구 순환 재촉과 현생 문명 파국의 공범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좌파냐 우파냐, 보수냐 진보냐 하는 물음은 근본 원인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그릇 위에 사과와 배를 올려놓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보다는 그릇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혁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혁명 품은 다시개벽이어야 한다. 필자가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할 때에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말일 뿐이다. 개인주의가 문제지 개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개인 없는 사회는 없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실체 없는 관념이 실체자들을 요소화하고 지배한 역사였다. 근대 이전에는 실체 없는 천명과 신권을 빙자하여 왕권과 교회가 지배했다. 근대는 계약한 적도 없는 비실체인 허구의 사회계약에 근거하여 계약의 대리권자로서 국가와 종이에 불과한 화폐에 법인이라는 인격을 부여한 자본의 연합체인 자본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역사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국가와 당이 노동자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당의 사회노예로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다. 그 사회가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필자는 진보와 보수의 선택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모두 무위(無爲)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전환을 만드는 적극적 무위를 통해 이화(而化)하기를 심고하고 또 심고한다.  괴뢰주체가 아니라 시천한 자기주체로서 다시개벽을 하는 것이 지금 동학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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