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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칼럼 006] 지구와 동행한다는 것: ‘여물’(與物)로부터 ‘여인’(與人)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 박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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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준(원광대학교) 


 

매년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재난들이 범지구적으로 창궐하는 시대, 우리는 우리의 눈을 지구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돌리도록 유도하는 힘들의 유인을 느낀다. 소비로, 웰빙으로, 다이어트로, 게임으로 우리의 눈길을 유인하던 힘이 이제는 앨런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처럼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눈길을 유혹한다.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하여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구원을 희구하던 고대 그리스의 영지주의적 꿈이 이제는 지구라는 ‘헬’을 탈출하여,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한다는 테크노-영지주의의 모습으로 변모를 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또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에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적 진보는 “인간이 필요없는 유토피아”를 내세우며, 인간이 얽매인 삶의 조건들로부터의 ‘해방’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기획이 되어가고 있다. 

이 전체주의적 기획이 우리에게 포스트휴먼 유토피아나 ‘사회적 이상’으로 제시되게 되면, 그 이상적 유토피아는 어떤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독재권력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역사적 혁명들의 실패를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이런 증상들은 이미 기호자본주의 체제로 자본주의가 진화하던 초기에 나타났다. 

네트워크에서 살아가려면, 네트워크의 알고리즘에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알고리즘 속에서 소위 ‘루저들’은 당연하게 버려진다. 소위 포스트휴먼 시대라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들의 눈부신 발전들이 가져올 꿈같은 미래가 선포되지만, 동시에 이미 기호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경쟁에서 탈락할 운명의 ‘프레카리아트’(precariot)가 되어, 무기력과 무능 그리고 우울증에 빠져 살아간다. 유토피아에는 이런 불행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이들의 존재는 테크노-유토피아에서 억압의 대상이 된다. 기술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꿈이 넘쳐나는 시대를 우리는 ‘테크노-영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악한 세상으로부터의 영적인 초월을 꿈꾸던 영지주의처럼, 테크노-영지주의는 ‘기술을 통한’ 세계와 인간적 조건들의 초월을 꿈꾼다. 

테크노-영지주의 시대에 마치 기독교적 성육신 개념을 세속화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 디지털 네트워크로 마음을 업로드하거나,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대신, 철저히 흙에 기반하는 우리의 생물학적 토대를 기반으로 삼는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흙의 시대’를 열자며, ‘술루세’(Chthulucene)를 제안한다.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를 ‘흙적인 것’(the terrestial)으로 새롭게 규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결코 ‘호모 사피엔스’로 불리던 인간 종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경계를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흙과의 얾힘을 공유하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하면서, 흙과 동행하는 삶을 포스트휴먼 시대의 모토로 삼는다. 이 세속화된 버전의 ‘성육신’ 이야기 속에 전능한 신의 은혜는 없다. 오히려 흙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신을 실현한다. 에티 힐레줌의 ‘자기만의 하나님’처럼,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수 없을 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도울 때라고 고백하는 듯이 말이다. 

최근 부르노 라투르는 이 흙과 동행하는 신을 ‘가이아’로 재해석한다. 라투르의 가이아적 전환은 지구와 비유기체적 존재들을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으로 혹은 유기체적 관점으로 생명과 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인간 존재들 혹은 비유기체적 존재들과 ‘함께-만들어-나가는’(sympoietic) 과정에 초점을 둔다. 도나 해러웨이는 유기체를 ‘자가-생산’(autopoiesis)라고 규정하던 관점을 연장하여, ‘공동-생산’(sympoiesis) 즉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 재해석한다. 그 함께-만들기의 기반이 바로 지구이다. 이 지구 위에서 우리는 여러 다양한 존재들과 더불어 함께 삶과 집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브루노 라투르는 팬데믹의 격리가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들 중 하나를 ‘버섯을 재배하는 흰개미 이야기’를 통해 전한다. 흰개미들 중 특정류의 버섯과 함께-삶을-만들어가는(sympoietic) 종이 있다. 이 버섯들은 나무를 소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버섯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흰개미는 자신의 서식지를 구축하는데, 흙을 씹어서 내부가 온도조절이 되는 둥지를 만든다. 이 흰개미의 둥지가 버섯의 뿌리의 일부가 된다. 이때 흰개미는 흙을 씹어 배설하면서 점토처럼 만들어, 이 배설물을 둥지의 재료로 사용한다. 

라투르의 흥미를 끈 대목은 이 흰개미들은 결코 둥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이 흰개미들은 둥지를 확장하고 연장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활동반경을 넓혀 나간다. 즉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집에서 활동한다. 이 버섯재배 흰개미의 살아가는 모습이, 라트르가 보기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나 똑같고, 우리는 ‘격리’를 통해 우리의 이 흰개미같은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생물권’은 우리 “머리 위와 발아래로 불과 몇 킬로미터의 두께”에 불과한 일종의 “생물막”(biofilm)이고,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의 전부이다. 그 생물권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는 가운데 인간이 문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이 그 생물막 속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존재의 집’을 만들어 나간다—이런 면에서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틀렸다. 우리는 집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집을 연장(extend)해 가면서, 우리의 생활 반경을 넓혀 왔다는 점에서 버섯재배 흰개미가 살아가는 모습과 무척 닮았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다, 문득 팬데믹으로 격리가 되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라투르는 인간과 버섯재배 흰개미 간의 유사성을 이렇게 인식하였다. 

우리의 삶은 결코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이란 언제나 동행이다. ‘동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company’는 빵(panis)을 함께(com-, together) 나누는 사람을 가리킨다. accompany에서 접두어 ‘acc-’는 다가간다는 뜻을 함의한다. 따라서 ‘동행하다’(accompany)는 다가가 함께 빵을 나눈다는 뜻을 함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음식을 나누는 존재를 우리는 ‘식구’(食口)라고 표현한다. 그렇게에 동행하는 존재는 식구이고, 우리는 그렇게 식구들과 더불어 지구라는 집에서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를 여물(與物)의 철학, 혹은 여인(與人)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與)라는 말에는 “주다, 베풀다, 동아리가 된다, 따르다, 돕다, 허락하다, 편을 들다, 좋아하다”라는 뜻이 함의되어 있는데, ‘여물’은 빵을 베풀고 함께 하는 관계를 의미하고, ‘여인’은 인간됨(being human)의 관계를 베풀며 함께 ‘사람’이 되어가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human betweenness)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베풀며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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