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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강좌 005] 동학주문과 김지하의 생명 / 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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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모시는 사람들 동경대전 강좌 오리지널 콘텐츠입니다.

         강주영 / 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이번 글은 순서에 따라 포덕문 문장의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다뤄야 합니다. 하지만 동학을 생명사상으로 해석한 김지하의 환원(2022. 5. 8)을 맞아 그의 생명사상을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생물학에서의 생명이 무엇인지는 사전적으로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김지하는 생명(生命)을 사상과 철학의 주제로 대두시켰습니다. 동학∙천도교에서 ‘생명’은 야뢰 이돈화가 ‘무궁한 생명주의’라는 말을 신인철학에서 이미 하였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김지하일 것입니다. 하지만 수운이 천(天)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은 것처럼, 김지하도 생명을 개념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럽철학에는 생(명)을 언급하지 않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동학의 21자 주문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을 중심으로 생명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김지하는 동학∙천도교에 하날님, 하늘님, 한울님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굳이 ‘생명’이라는 말을 쓸까요? 천도교의 분위기를 정성적으로 보면 김지하의 생명사상 동학을 존중하지만 사실은 경원시합니다. 말은 안 하지만 “인내천을 인정하는 마음이 그 주체의 자리를 점하여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모시는 것이 교체(천도교의 핵심)다.”(人乃天認心 其主體位占 自心自拜敎體)- 의암성사법설 대종정의-를 편독하여 수련-수양에만 중점을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천도교인들은 동학∙천도교 사상을 확장하고 깊이 있게 하는 일에 무심해 보입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날 천도교 쇠락의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지금 비천도교인으로서 동학을 말하는 이들은 ‘동학’이 아닌 ‘동학혁명’으로부터 끌린 분들이 많습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으로부터 감화받아 동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수운사상을 유럽, 미국의 철학과 비교 검토한 이로는 ‘수운과 화이트헤드’라는 책을 펴낸 김상일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수운은 논학문의 강령 해설 대목에서 말하기를 ‘기자허령창창 무사불섭 무사불명’(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이라고 합니다. 천도교는 이 문장을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간섭과 명령을 전지전능한 신의 독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동경대전 전체의 맥락 뿐 아니라 21자 주문의 맥락으로 보더라도 상호연관성의 조화(造化, 생성) 과정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무사불섭 무사불명의 주체는 천이 아니라 ‘기자’라는 존재(것? 존재는 인격 비인격 모두에게 해당합니다.)입니다. 기가 천의 본질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허령창창’은 ‘온 우주에 가득하다’고 풀면 쉬울 것 같습니다. 한자어 섭涉은 ‘간섭, 참견’이라기 보다는 ‘도움’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고 중국에 있는 김유익 선생이 제게 말한 바 있습니다.

 

 ‘기’는 비인격적 요소의 ‘것’으로서 어떤 주체에 있는 영이 사건과 생성의 실체로서 드러나는 것을 기화라고 하며 이를 ‘강’(내릴 강降)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령(降靈)이라는 것은 내게 없는 영이 밖으로부터 와서 내게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모셔진 영이 기화하는 것이라고 수운은 분명하게 “대강자 기화지원야大降者 氣化之願也”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시천이란 주체의 밖에서 모셔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체가 생성될 때 근원적으로 주체의 질로서 ‘영’이 모셔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들은 이미 시천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시천이 조화정에 이르려면 기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문을 하는 것입니다. “「대강」이라는 것은 기화를 원하는 것”라고 천도교 경전은 풀이합니다. 여기서 ‘영’이라는 것은 이성, 감성, 감정, 신령스러움, 영성 등등으로 분별하여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시천주(侍天主)할 때의 시천주가 시천/주인지, 시/천주인지 제 입장에서는 참 논쟁적입니다. 이 글을 이어가면서 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란 것은 조화의 원체 근본’(氣者造化之元體根本也 -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이라고 해월은 말합니다. 이미 모든 존재들은 자기 몸 안에 근원적으로 ‘영’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존재가 생성되는 그 순간 ‘영’을 가지고서 납니다. 해월은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다”(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고 합니다. 영과 기는 존재자의 고유 속성이면서도 영과 기 그 자체는 비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영과 기는 부분 요소가 아니라 존재와 그 자체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영 자체는 아직 무엇 무엇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기불로(玄機不露 동경대전 탄도유심급) 즉 불연(不然)한 상태입니다. 이 영이 바탕 자체에 응하여 체(존재)를 이루며 드러나는 조화생성과정이 기화(氣化)입니다. 불연한 영이 기화하는 과정이 불연기연입니다. 무위이화이기도 합니다. 

 

 ‘기’는 모실 시(侍) 풀이의 ‘내유신령 외유기화’ 때문에 주체자, 자체자(김상일의 용어)의 바깥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건, 존재는 이미 강령된 존재 즉 내유신령한 존재로서 존재자체에서 기화가 일어납니다. 내와 외는 한 존재자체에서 영과 기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영과 기가 통합되고 일체화됨으로서 조화정을 하게 됩니다. 동학의 여러 글들에서는 영(靈)이 아주 많이 표현됩니다. 

 

 이 ‘영’에 대해서는 의암 손병희의 글을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주는 원래 영의 표현이다...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 문득 영성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영의 결정으로써 만물의 조직을 낳았다. 만물의 조직으로써 다시 영의 표현이 생겼다. 그러므로 영과 세상은 같은 이치의 두 측면일 따름이다. 대신사(수운)가 일찍이 주문의 뜻을 풀어 말하기를 「모신 것이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영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인 정의를 도파한 것이다...사람은 이에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자로 만기만상의 이치를 모두 한몸에 갖추었다. 사람의 성령은 이 대우주의 영성을 순연히 타고난 것임과 동시에 만고억조의 영성은 오직 하나의 계통으로서 이 세상의 사회적 정신이 된 것이다.” ” - 의암성사법설 성령출세설, 한자원문 생략 -

 

 의암은 ‘영’을 어떤 주체자, 자체자, 것(물건)들과 동떨어진 알 수 없이 신비로운 그 어떤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영은 기화하는 실체자입니다. 영은 기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는 비인격적 요소입니다. 영과 기는 하나의 두 측면입니다. 전체가 부분을 품고 부분은 전체를 품습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닙니다. 부분의 합을 전체라고 하는 것을 요소론 또는 기계론이라고 합니다. 손병희는 “영과 기운이 본래 둘이 아니요 도시 한 기운이다.”-의암성사법설 강론경의-라고 합니다. 앞서 해월도 “천지, 음양, 일월, 천만물의 화생한 이치가 한 이치기운의 조화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 나누어 말하면 기란 것은 천지 귀신 조화 현묘를 총칭한 이름이니 도시 한 기운이니라.”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고 합니다. 

 

 동학의 주문은 비인격적 요소와 인격적 요소를 탁월하게 통일합니다. 상제, 귀신, 천주, 하늘님, 하날님, 하느님 등은 인격적 요소입니다. 그런데 수운은 양학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다고 합니다. 기(氣), 무(無), 도(道), 법(法), 이(理) 등은 천도교경전에 많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비인격적 요소인데 서양신에는 이런 비인격적 요소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 한국에서 유불도는 비인격적 요소가 확대되어 왔습니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이, 기라는 비인격적 요소가 강화되어 왔습니다. 수운은 인격과 비인격을 21자 주문에 이원론을 분리할 수 없는 일원으로 통합합니다. 서양에서는 반대로 인격신만 강조되어 니이체는 그 인격신의 사망을 선포해버린 것입니다. 수운의 서양철학이나 서양 신관에 대한 놀라운 혜안인 것입니다. 이런 수운의 견해를 상고하면서 생명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시천주 조화정을 하게 됨으로서 영과 기는 생명이 됩니다. 생(生)을 태어남 즉 사건과 목숨의 생성 즉 조화정, 불연기연의 전개, 무위이화의 과정, 조화의 펼쳐짐, 기화의 역동성 등의 뜻을 가진 말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생령이라 하지 않고 생명이라 하는가? 수운은 동경대전의 여러 글에서 ‘명’을 언급합니다. 그 용례를 찾아 봤습니다. 

 天命(포덕문), 無事不命, 其人 貴賤之殊, 與天地違其命, 人之常情而乃在天(이상 논학문), 孤我一命, 知先儒之從命(이상 수덕문) 平生受千年運(절구), 不知之所在(전팔절)

 위 글들에서 명은 목숨이기도 하고 천의 명령이기도 하고 여러 뜻으로 쓰입니다. 명은 포덕문 첫 문장처럼 사시성쇠 춘추질대 불천불역한 천주조화지적의 담지자이기도 합니다. 이 명이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김지하 황톳길)것처럼 있다면 생명이 아니고 명이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김지하 황톳길) 뛰는 것처럼 펄떡일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즉 생명은 영 또는 명의 담지자이지만 그것으로 생명은 아닙니다. 기화하고 조화생성 즉 사건과 생성의 주체가 될 때 비로소 생명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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