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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강좌 004] 우부우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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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모시는사람들-오리지널콘텐츠입니다.

강주영 (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1.

『동경대전』「포덕문」 2절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우부우민 미지우로지택 지기무위이화의)를 『천도교경전』에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니…”라고 풀이하고 있다. 계속해서 「포덕문」에서는 다섯 임금[五帝] 이후에 성인이 잇달아 나시어 천도를 밝혀 책을 펴냈는데,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것으로서 가르쳐 천도와 천덕을 밝히심으로써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게 하였다고 설파한다. 

 

보통은 ‘우부우민’을 「포덕문」 1절의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해설한다. 틀린 해설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이 생긴다. ‘천주조화지적’을 몰랐으면 그때 사람들은 무엇을 알고 살았을까? 천주조화지적을 모른 것은 ‘오제 이전’의 사람에게 한정되는 것일까? 동경대전의 문맥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성통공완 제세이화 홍익인간(性通功完 在世理化 弘益人間)의 지혜와 이상을 남긴 단군들, 노자, 공자, 묵자, 장자, 삼교포함접화군생(三敎包含接化群生)을 남긴 최치원, 원효, 정도전, 이도(세종), 이이, 이황, 이순신... 등등 우리 역사에 빛나는 수많은 분들도 결국은  ‘우부우민’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달리 말하면 오제 이후에 성인, 군자들이 우부우민이 아니라면 부처님, 예수님은 왜 한울님을 성공하게 하지 못했는가? 수운은 어떻게 해서 오만년 만에 처음으로 한울님을 성공하게 한 성인이 되었는가? 

 

수운은 『용담유사』「용담가」에서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고 한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수운 이전의 사상, 말씀, 교(敎), 학(學)들은 ‘허무지설’(虛無之說, 용담유사 도덕가)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운 이전의 역사는 쓸모없다는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우주는 「포덕문」 1절처럼 사쇠성쇠 춘추질대 불천불역하는데(앞의 연재 글 참조), 사람들은 성인, 군자 할 것 없이 죄다 헛것에 빠져 살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종래의 학자, 성인, 군자 들이 저마다 제 역할이 있었고 그것들을 해 왔지만 이제 그것이 유효성-수명이 다했다는 것일 테다. 이때 비로소 “네가 또한 처음”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개벽 선언의 근거요, 몸통이며, 꼬리가 되는 말이 된다. 

 

2.

도올은 우부우민을 “특별한 의식이 없는 보통사람”(도올, 『도올동경대전2』, 63쪽)들이라고 풀이한다. 도올은 “인간들은 다 어리석었나? 나는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 협애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외면적인 피상적인 규정성을 벗어날 때에만 우리는 수운의 인간관, 역사관, 사회 개혁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도올, 위의 책, 33쪽)고 한다. 필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도올이 우부우민을 “특별한 의식이 없는 보통사람”이라고 안일하게 해석한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보통사람은 특별한 사람을 전제한다. 부처, 공자, 노자, 성인, 군자와 대칭되는 보통사람이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보통사람이라니? 이는 도올이 말한 수운의 인간관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보통사람이 아닌 특별한 의식이 있는 분들은 천주조화지적을 알았다는 것인가? 도올이 명시적으로 그리 쓰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동학, 천도교의 핵심이라 할 ‘오심즉여심’을 도올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심즉여심은) 매우 신비롭고 애매하게 들리는 祕語(비어)처럼 생각되지만 실상 수운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유교적 세계관․인간관을 좀 색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이것은 정통 주자학에서 말하는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색다른 맥락에서 표현한 것이다. 송유들의 사상은 이 천인합일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다.” 도올, 위의 책, 122쪽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바, 필자는 도올이 동학을 ‘개신유학’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판단한다. 유교를 만든 후한대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부터 유래하여 송유들의 ‘천인합일’의 관점으로 도올은 ‘오심즉여심’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 필자는 『동경대전』「논학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도올의 관점에 따르면 보통사람이 아닌 성리학자들은 이미 ‘천주조화지적’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수운이 한 일은 ‘동학 창도’가 아니라 ‘유학 개신’이 되고 만다. 

수운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동경대전, 논학문 6절)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삼라만상 억조창생이 곧 하늘이요, 한울이라고 하였다(‘吾心卽汝心’을 말한 話者는 ‘한울님’이지만, 이 말은 곧 수운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한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논구할 것이다). 이 선포는 삼라만상 억조창생이 곧 “춘추질대 사시성쇠 불천불역 천주조화지적”의 임자, 주체, 우주적 조화자, 우주적 사건의 생성자(앞글 3회 「사건을 내는 천주조화지적」 참조)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송유들의 ‘천인합일’처럼 ‘천’과 ‘인’이 따로 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합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수운의 오심즉여심은 출발부터가 천과 인이 동격이라는 합일이 아니라 천과 인의 구분을 없앤 것이다. 성리학에서 천인합일은 성인, 군자만의 특권(?)인데 반하여, 수운은 우부우민도, 도올의 표현으로는 특별한 의식도 없는 보통사람도 하늘, 한울이라고 한 것이다. 

 

3.

수운의 ‘우부우민’은 무위이화(無爲而化, 무위이화에 대해서는 따로이 한 장(章)으로 자세히 논할 것이다.)의 주체자가 바로 내유신령(內有神靈, 동경대전 논학문 13절)한 자기 자신임을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억조창생을 ‘오심즉여심’, ‘내유신령’이라 한 수운이 어찌 사람을 어리석거나 아둔하거나 할 수 있겠는가? 수운은 『동경대전』「논학문」 1절에서 사람이 가장 신령하다는 뜻의 최령자(最靈者, ‘만물의 영장’이라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깨달은 자만이 ‘최령자’인 것은 아니다. 

 

『동경대전』 전체 글로 볼 때에 ‘우부우민’은 보통사람과 성인, 군자의 구별도 아니요, 더더구나 세상 사람들을 아둔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다. 수운이 깨달은 천도를 알아야만 한울인 것은 아니다. 수운 이전이나 수운 이후나 사람과 털벌레 삼천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모두 한울이다. 해월은 이를 두고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인시천 사인여천 人是天 事人如天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1절)고 하였다. 나아가 “해월은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17절)고 하였다.

 

‘우부우민’이란 말 그대로 아둔하여 슬기롭지 못한 부정의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억조창생이 각자 자기 자리와 시간 속에서 한울로서 우주적 조화자, 생성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운 이전의 모든 역사를 통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억압하는 질서, 그런 학과 사상에 대한 경고와 질타의 죽비인 것이다. 그것은 도올의 말처럼 보통사람에 대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을 질타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경대전』「논학문」에서 우부우민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된 문장이 있다. 

“사시성쇠와 풍로상설이 그 때를 잃지 아니하고 그 차례를 바꾸지 아니하되 여로창생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떤 이는 한울님의 은혜라 이르고 어떤 이는 조화의 자취라 이르나, 그러나 은혜라고 말할지라도 오직 보지 못한 일이요 조화의 자취라 말할지라도 또한 형상하기 어려운 말이라. 어찌하여 그런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니라.”(四時盛衰 風露霜雪 不失其時 不變其序 如露蒼生 莫知其端 或云 天主之恩 或云化工之迹 然而以恩言之 惟爲不見之事 以工言之 亦爲難狀之言 何者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 『동경대전』「논학문」 3절) 

 

필자는 이 문장을 종래의 학(學)이 그 수명-유효성을 다하여 뭇 생명을 우부우민으로 만들고 있다고 질타한 것으로 본다. 수운은 『용담유사』「교훈가」에서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쓰고 있다. 앞서 필자는 “‘우부우민’을 ‘천주조화지적’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한 해설을 틀린 말은 아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이다. 우부우민은 더불어 종래의 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말이기도 하다. 

 

도올이 ‘우부우민’을 ‘보통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을 도외시한 것이다. 도올은 공자나 노자에 대한 (수운, 동학의) 비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도올 동경대전』(통나무)을 아무리 눈 씻고 읽어도 동학이 노자나 유학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필자가 ‘비판’이라고 한 것은 노자나 유학을 통으로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생명이 단백질에서 왔지마는 생명을 단백질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동학은 유불도에서 배울 것은 가져왔지만 유불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명은 단백질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부우민은 대각하기 전의 수운 자신이기도 하다. 우부우민은 치열한 성찰의 언어다.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어리석음을 야기하는 것/사람이 우부우민이다.  『용담유사』「교훈가」 수운은 대각하기 전의 자신을 이렇게 쓰고 있다. 

 

“슬프다 이내 신명(身命) 이리될 줄 알았으면 윤산(潤産)은 고사하고 부모님께 받은 세업(世業) 근력기중(勤力其中) 하였으면 악의악식(惡衣惡食) 면치마는 경륜(經綸)이나 있는 듯이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혼자 앉아 탄식하고 그럭저럭 하다가서 탕패산업(蕩敗産業) 되었으니 원망도 쓸데없고 한탄도 쓸데없네 여필종부(女必從夫) 아닐런가 자네 역시 자아시(自兒時)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던 말을 일시도 아니 말면 부화부순(夫和婦順) 무엇이며 강보(襁褓)에 어린 자식 불인지사(不忍之事) 아닐런가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차차차차 지내보세.” (『용담유사』 「교훈가」 3절)

 

이런 수운의 마음을 신동엽 시인은 유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일부 

 

많은 경우 이 시를 저항시로 읽지만 이 시는 절절한 구도(求道)의 시다. 이 시와 수운의 「포덕문」 ‘우부우민’과 「교훈가」는 서로 통하고 있다. 이런 마음을 읊은 시로는 그 유명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 영변에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일부 

 

나 보기가 역겨워 간다는데 말없이 고이 보내고, 나아가 가는 길에 꽃까지 뿌리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가는 ‘님’은 나와 떨어진 어떤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한울과 일체화되고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오심즉여심’한 님이자 ‘각지불이’한 님이다. 소월 시 ‘진달래꽃’은 구도하지 못한 슬픔이자 구도의 염원이기도 하다. 가실 길은 구도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꽃을 뿌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부우민은 슬픔과 비탄, 안타까움이 있는 ‘천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언어이자 종래의 학(學)에 대한 강력한 성찰과 비판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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