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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철학자들 - 포함과 창조 사이 새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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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나, 날


1


“여기 누구 과인을 아는 이 없는가?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셰익스피어, <리어왕> 1막 4장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과제가 아닌가 싶다. 아예 그 일에 매달려 면벽, 장좌불와의 선 수행을 하는 이도 있고, 하나님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고 믿고, 오직 ‘주여!’를 부르짖으며 구원을 갈구하는 이도 있다. 

리어왕의 위 대사는 동아시아에서는 호접지몽(胡蝶之夢), 이른바 ‘장자의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진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곧 놀랍게도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 「제물론」

 

장자와 거의 비슷한 시기(기원전400~300년 전후)에 살았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동굴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동굴 속에서 등 뒤의 햇빛에 의해 동굴 벽에 만들어진 자기 그림자를 보며 살아온 ‘동굴 속 사람’ 중 한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가서, 그곳에서 진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와 ‘실재는 여기에 있고, 저것은 그림자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림자를 실재로 믿고 있는 이들은 누구도 그 ‘한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얘기.

 

이처럼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지향이 ‘참 나(존재)’ 혹은 ‘나(존재)의 본성’을 구하는 데에 맞춰져 있다.  


살아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동굴 밖 세상, 깨달음의 세계)가 실재이고 참인가, 아니면, 지금-여기에서 내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세계(그림자 세계)가 그나마 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 과학만능주의 - ‘과학교(科學敎, scienci-gion)’이 종교계를 일통(一統)한 시대,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지금-여기 현실, 현상, 현재만이 실재이자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시대에 나는, 인간은 “다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느껍게 말하고 있는가?


100년 인생이 길다면 길지만, 실은 짧아도 너무 짧다. 그 짧은 인생 가운데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실마리라도 확인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 살다가는 보람을 느껴도 좋으리라. 


준동(蠢動)이라고 할 때 ‘준(蠢)’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리석은, 미물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혹은 그러한 인간을 나타내는 말로 더 자주 쓰인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에, 혹은 살아가면서 때때로 내 삶이 ‘준동(蠢動)’에 불과했음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2


그러나, 실상 그 모든 허무와 준준(蠢蠢)의 감정은 내가 어떻게 나인지,  그 실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동학에선 “내가 나 된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이 (저기에) 계시는구나!” 하고 노래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을 거슬러 올라가니, 맨 첫 부모님 - 한울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통찰했다. 그것이 동학이다. 동학의 이치와 진리, 가르침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다. 나는 겨우 몇십 년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앞으로 몇십 년을 살다가 가는 ‘여로창생’(如露蒼生, 이슬같이 금방 사라지는 창생)이 아니다. 나에게는 수천, 수만 년에 걸쳐 쌓여 온 조상들의 피와 살이 들어 있고, 그 조상들을 먹여 살린 해와 달, 비와 이슬의 은혜가 녹아 있고, 그 해와 달, 비와 이슬이 오고 가고 돌고 도는 지구-우주가 백그라운드-보디가드로 놓여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면, 좁히고 좁혀서, 지금 내가 하는 있는 마음, 생각, 앎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이야기해 보면 좀 더 쉬울 수도 있겠다. 우리가 우리를 통틀어 ‘한국인’이라고 할 때, 혹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할 때, 그것은 피와 살과 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한반도로 국한하든, 만주까지 넓히든)에서 살며 듣고, 말하고, 읽고, 쓰고, 보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오늘, 지금 여기의 나를 형성하고 보존하고, 외호(外護)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보면, 자신감(자만심)에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이며, 때로 우울하고 절망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느라, 육욕과 물욕에 찌들어 사느라, 나의 나 됨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게다가 온갖 환경-호로몬 따위에 중독되어 생리학적 수준에서 오염된 데서 나온 감상(感傷)일 뿐이다. 

 

그러한 감상, 그러한 자만심을 벗어나,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그러기 위하여,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사랑하며,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나를 지켜주는 모든 것이 나의 타자이자 나를 나 되게 하는 넓은 나, 큰 나임을 알게 되면, 행복은 절로(無爲而化)로 나를 둘러싸고 넘쳐서 세상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을, 오래된 지혜들은 누누이, 겹겹이, 때때로, 낱낱이 말한다.

 


그중에 여기, <한국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에는, 오늘의 내가 나 되기까지, ‘우리들’ ‘나의 부모님의 부모님들’ ‘나의 스승님의 스승님들’이 해 온, 길러 온, 익혀 온, 가르쳐 온, 깨달아 온 철학-사상을 소개한다. 드러난 표제인물이 15명이지만, 그 안에는 갈피마다 더 많은 철학자들이 깃들어 있다. 

 

이들의 생각, 이들의 고뇌가 오늘, 지금, 여기, 현존재로서의 나의 원형이고, 전생이며, 본질이고, 과정이며, 미래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생각을, 고뇌를, 심오함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내 생각의 본래, 내 고뇌의 본질, 내 내면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나를 쳐다보는 일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나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는 일이다. 


3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내가 누군지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허튼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내가 누군지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 지식과 정보가 차고 넘치고 볼거리, 들을 거리, 먹을 거리, 입을 거리가 넘쳐 넘쳐서 포화상태를 지나 부패상태에 진입한 세계에서, 다시 돌아볼 것은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나로서 나를 살고 있는가?’ ‘나는 내가 갈 길로 가고 있는가?’ 너무, 오랫동안, 자주 골몰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지만, 언제나, 때마다, 빠짐없이 되뇌어야 할 물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각자)가 서 있는 것이 거인의 어깨 위임을, 그러므로 우리는 선인들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이 볼 수 있음을, 자기 앎을 배반하고 배제하고 배척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지혜로울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나’를 찾아가는 길라잡이가 된다. 그 '날'을 맞이하는 마중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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