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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동학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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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든 철학이든, 어떤 사회 현상이나 물상을 막론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함의와 수용 양상, 그리고 그것을 실행/실천하는 방식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즉 필연적인 일이고,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하여, 해월 최시형 선생은 '용시용활(用時用活)' 즉 "때에 맞게 변화하고 활용하라" 하라고 하셨다.


2. 

동학(東學)은 종교(天道敎)이자, 천도(天道=無極大道)이며, 학문(東學)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마다 태도와 접근은 더욱 다양할 수밖에 없다.[동학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동학은 교[종교]로 이해할 수도 있고, 도[천도]로 이해할 수 있고, 학[동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이자 도이자 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더 진리에 적확한 접근이 아닐까. 일찍이 풍류도가 포함삼(包含三敎)라고 하였듯이. 이는 동학 초기에, 동학에 열중한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공부하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동덕공동체'를 이루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개벽되어 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3. 

동학이 시대의 격변을 거쳐 오면서, 여러 차례의 굴곡을 겪고[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동학에 대한 이해가 점점 '학(學文)'으로서 접근하는 경향이 농후해지는 것은 점검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는 우선은 동학이 비세(非勢)를 면치 못하는 가운데서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주로 지식인이거나 지적인 추구 성향이 왕성한 데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는 오늘의 세계가 '합리성'을 최우선 가치 또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규칙으로 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누구나 학교를 통해서 지식을 배우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근거를 가지고 말하기(쓰기),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말하기(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의 가장 근본주의적인 글쓰기가 '논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4. 

동학을 한다는 것은, 동학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에서 학문(학, 교, 도)을 한다는 것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전제하는 것이고, 지행합일이 결여된 학문은 곡학아세(曲學阿世)나 매문매필(賣文賣筆) 따위로 비난을 받았다. 동학이 유불선을 비판하면서 창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불선의 각 학문(학, 교, 도)가 바로 그러한 곡학아세, 매문매필의 지경에 함몰되어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오늘의 동학공부가 곡학아세나 매문매필로 전락하였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으나[공부하시는 분들의 진정성은 물론이고, '동학'이 돈이 되는 학문 주제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측면에서 동학을 동학다이 공부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인 듯하다.


6. 

오늘에,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오늘, 다시 동학의 진리가 시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때에, 동학 공부의 길을 올바르게 터득하는 일은 더욱 요긴한 일이다. 핵심 관건은 학이든, 교든, 도든, 그것을 공부하여 나를 새롭게 하고, 이웃[人與物]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을 개벽이라 한다.


7. 

수도(修道)와 수학(修學)과 수행(修行)이 정립(鼎立)의 조화(造化)를 잃지 않는, 동학공부를 할 일이다.


* 이 글은 2021년 9월 9일, 페이스북에 게시하였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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