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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칼럼 002] 문명개벽을 꿈꾼 한국의 스승, 의암 손병희 / 김용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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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휘 / 대구대 교수

천도교사범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1909년 5월 30일 - 당시의 중앙총부) 앞줄 가운데 부채 든 이가 당시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성사, 그 왼쪽이 춘암 박인도 대도주. 

               

-100주기를 추모하며

 

올해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5월 19일). 선생의 삶은 단순히 천도교 지도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한평생 보국안민을 실천한 삶이었으며, 치열한 수도자(修道者)의 삶이었다. 또한 기존 학계에서 평가하듯이 단순히 서구적 문명개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동학의 인내천에 입각한 문명적 차원의 다시개벽을 꿈꾼 개벽 사상가였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분의 진면목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선생의 사상은 보통 인내천(人乃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자각은 인내천이 아니라 ‘시천주(侍天主)’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거룩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학을 천도교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다분히 신비체험의 요소가 강한 ‘시천주’ 대신 ‘인내천’을 종지로 삼았다. 인내천은,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한 존재이므로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주로 풀이된다. 하지만 좀 더 영성적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내면에 하늘이 통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의 내면에 하늘이 통합되어서 나의 가슴으로부터 하늘이 열리고, 나의 가슴으로 다시 하늘이 닫히는, 그런 창조적 주체에서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생의 삶과 사상에서 지금까지 주목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성령출세(性靈出世)’이다. ‘성령출세’는 1910년 2월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49일 수련을 마치고, 한때 수운 선생이 수도했던 천성산 적멸굴을 방문했을 때의 자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때 흔히 말하는 대각(大覺)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핵심은 다름 아닌 우주가 하나의 영으로 꿰뚫어져 있다는 자각이다. 선생은 그것을 달리 성령출세, 즉 “세상은 하나의 영의 표현이다.”라고 했다. 성령(性靈)은 숨겨진 차원의 우주적 영(靈), 우주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본체인 하나의 영, 그것이 펼쳐져 물질화된 것이 세계이며,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 안에 다시 우주의 영이 깃들어 있다. 이를 수운 선생은 ‘내유신령’이라고 불렀고, 해월 선생은 ‘심령’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성령’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천과 인의 본질적 동일성에 좀더 주목했다. 

평소 선생이 가장 강조한 것은 ‘이신환성(以身換性)’이었다. ‘이신환성’이란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뜻인데, 마음을 항상 육신 쪽에 두지 말고, 성령(性靈) 본체에 두라고 하는 것이다. 육신은 한때 잠깐 왔다가 가는 일시적 객체라면 성령은 영원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주체인 성령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1912년 3월 우이동에 봉황각을 지은 후 전국의 대두목들을 모아놓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이 ‘이신환성’을 가장 많이 이야기했다. 이때의 ‘이신환성’의 의미는 사실상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쳐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당연히 3.1혁명이다. 요즘은 3.1운동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3.1혁명 또는 3.1대혁명으로 불렀다. 사실상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선생이 가장 주력한 것은 독립이었다. 그걸 위해 보성전문을 직접 운영하여 인재양성을 꾀했고, 봉황각에서 전국의 대두목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사실 3.1혁명은 선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선생은 3.1혁명의 준비 과정에서 각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하나로 결집하고 운동의 원칙을 마련하는 등 기획과 자금, 조직 동원, 독립선언서 작성과 인쇄 등을 진두지휘했다. 불교와 기독교를 견인한 것도 선생이었고, 기독교가 자금이 없어 난색을 표할 때 선뜩 오천 원을 전달한 것도 선생의 통 큰 결단으로 가능했다. 또한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을 명목으로 성금을 100만원 모금하여 그중에 27만원을 건립에 실제로 쓰고 나머지는 독립자금으로 보낸 것도 선생의 기국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정황을 아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 이후 임시정부를 설립하면서 그를 국가수반인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귀국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손병희 선생 묘소 참배였다. 3.1혁명의 핵심에 선생이 있었지만, 지금은 3.1혁명 하면 유관순을 떠올리는 것 같아 좀 씁쓸한 느낌이다.

선생의 삶은 한평생 육신의 험고를 달게 여기며 오로지 보국안민을 위해 헌신했던 삶이었다. 동학의 입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 일본 외유와 갑진개화운동, 천도교로의 개편, 교육사업과 인재양성, 1910년대의 독립의 준비와 3.1혁명 등 모든 것이 보국안민의 실천이었다. 나아가 독립선언서에 “위력의 시대는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과거 전세기(全世紀)에 연마 단련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始)하도다.”라고 했듯이, 선생은 단순한 독립을 넘어 인내천의 도덕에 바탕한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명을 꿈꾸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수도(修道)를 통한 정신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을 이신환성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선생은 늘 수도와 사회적 실천의 병진을 강조했다. 이러한 선생의 삶은 오늘날 여러모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 선생의 환원 100주기를 맞아 그분의 정신이 제대로 조명될 수 있길 바란다. 선생의 성령이 우리 후학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심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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