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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역사란 피가 흐르는 생명체 / 일요서울 / 한국학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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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역사란 피가 흐르는 생명체

역사란 피가 흐르는 생명체이다. 그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의로운 목숨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고 불멸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찬연한 빛을 발하는 우리 한민족(동이족)의 과거와 미래를 읊었던 저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예지(叡智)를 빌려서라도 그 맑고 광대했던 우리 역사의 진실을 되찾고 역사적 소명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공자는 우리 동이(東夷) 문화를 흠모하여 ‘영원불멸의 군자국’ 구이(九夷: 東夷의 아홉 종족)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미약했던 시기에도 코리아의 밝은 미래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예단은 끊이질 않았다.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197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소설 『25시』(1949)에서 자신이 예언한 동방, 말하자면 ‘25시’라는 인간 부재의 상황과 폐허와 절망의 시간에서 인류를 구원할 동방은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코리아 찬가』(1984)는 한민족의 사상과 정신문화에 대한 깊은 경외감의 표출이며 예언적 묵시록이다. 그는 한민족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천절을 봉축하는 ‘영원한 천자(天子)’이며 ‘세계가 잃어버린 영혼’이고, 한반도는 동아시아와 유럽이 시작되는 ‘태평양의 열쇠’로서 세계의 모든 난제들이 이곳에서 풀릴 것이라고 예단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의 유력 주간지 <라 프레스 프랑세즈>(1986.4.18.)를 통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통치이념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게오르규의 직관은 유럽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의 인지학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의 직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류 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의 양식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데, 깊은 영성을 지닌 이 민족은 거듭되는 외침과 폭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쓰라린 내상(內傷)으로만 간직한 민족이다. 그는 극동에 있는 성배의 민족을 찾아 경배하고 힘을 다하여 그들을 도우라고 유언했다. 그의 일본인 제자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는 일본에 돌아와 문헌과 정보 등을 탐색한 끝에, 이 성배의 민족이 바로 한민족임을 깨달았노라고 김지하 시인에게 실토한 바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澄心錄 追記)』에는 박제상 공(公)의 14세손 문현 선생이 신라 제52대 효공왕 왕위 계승 분쟁에 즈음하여 백 세의 고령으로 국중(國中)에 발언하여 세론(世論)을 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신라 입국(立國)의 근본은 부도(符都: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수도)를 복건하는 데 있다.…이는 입국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년이 지났다고 해도 어제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옛날의 조선은 곧 사해의 공도(公都)요 한 지역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씨(檀氏)의 후예는 곧 여러 종족의 공복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그의 일갈에 국론이 크게 바로 잡히고 왕위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 제1 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했으니, 그가 신라 제53대 신덕왕이다. 참으로 천손족으로서의 당당함과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의 뿌리 역사인 상고사와 그 후속 문화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반도에 갇힌 역사가 아니라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역사로서 인류 문화·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상고사 인식은 무호 최태영 교수를 사사(師事)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1900년생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산 증인인 무호 선생과의 인연은 1989년 가을 『한국상고사』라는 그의 책을 읽고 우리 역사에 눈뜨게 되면서 매주 우리 역사 강의를 들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한국 법학계의 태두이자 초창기의 한국 대학들을 키워낸 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을 역임하고, 우리 상고사 복원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는 98세까지도 대학 강단에서 역사 강의를 했다.

그는 우리 역사가 ‘일본의 황통사 식민사관’ 그대로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77세에 새로운 한국학을 시작했다. 어릴 적에 한문과 고사(古史)․고기(古記), 일본 고문 등을 익혀 초보적인 소양이 있는 데다가 그의 조부와 장지영, 김구 선생으로부터 우리 역사를 배운 것이 기초가 되었고, 더 깊게는 한국의 법사상을 연구하다가 한국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호 선생은 두계 이병도와의 수년에 걸친 토론 끝에 그를 설복하여 마침내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재를 밝힌 『한국상고사입문』(1989)을 이병도와 공저로 출간했다. [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연재 칼럼을 큰 가르침을 주신 무호 스승께 헌정한다.

<출처: 일요서울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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