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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단군신화인가 단군사화인가 / 일요서울 / 한국학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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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단군신화인가 단군사화인가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은 그 민족 고유의 사상과 역사적 체험이 용해된 신화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 또한 천·지·인 삼재의 융화에 기초한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역사적 체험이 용해된 단군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단군신화는 ‘환웅 천손족(天孫族)’과 원주민인 ‘곰 토템족’이 서로 융화하여 통혼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단군신선사상과 결합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배달국 신시시대가 마지막 18대 거불단 환웅[檀雄]에 이르러 곰 토템족인 웅씨의 왕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桓儉]을 낳아 단군조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조 첫머리에는 중국의 『위서』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했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라고 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치사상적으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지상의 곰의 교합에 의한 인간 단군의 출현 과정은 천·지·인 삼신일체에 기초한 홍익인간 이념의 발현과 그 맥을 같이한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이념은 단군조선 시대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환국 시대 때부터 유구하게 전승되어 온 것이다. 단군설화에는 곰이 삼칠일(21일)만에 사람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곰 토템족’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교화하는 과정을 동굴수련에 비유한 것은 정치의 교육적 기능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마음을 밝히는 교화와 함께 쑥과 마늘의 신비한 효능을 보여줌으로써 몸도 건강하게 유지하는 비결을 아울러 제시했다.

‘단군신화’냐 ‘단군사화(檀君史話)’냐 하는 문제는 바로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개국사화, 즉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삼국유사』(中宗壬申刊本(1512)) 고조선 왕검조선조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 환국에 서자 환웅이 있어(昔有桓國庶子桓雄)”로 시작한다. 즉, 옛날 환국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 대에 단군이 나와 조선을 개국했다는 내용을 전한 것이다. 일제가 변조하지 않은 초기 일본어 번역본에서도 ‘중종임신간본’과 마찬가지로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했던 것으로 나온다. ‘석유환국’의 중요성은 우선 환국의 역사적 실재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뒤이은 문장과 연결해 보면 환국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환웅이 배달국 신시(神市)시대를 열어 마지막 환웅 대에 이르러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아 고조선을 개국하는 일련의 역사적 연맥(緣脈), 즉 환국·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맥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일제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1938년 『조선사』(전 37권)를 완간하여 이를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게 했다. ‘석유환국(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을 ‘석유환인(昔有桓因: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으로 변조하여 이를 정본으로 내세운 것도 우리 상고사의 맥을 끊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말하자면 “옛날 환국에 서자 환웅이 있어(昔有桓國庶子桓雄)”를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어(昔有桓因庶子桓雄)”로 변조하여 환인의 서자(첩의 아들) 환웅이 신시시대를 열어 마지막 환웅 대에 이르러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아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식으로 읽히게 유도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아닌 ‘단군신화’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서자는 적자(嫡子)에 대비되는 의미가 아니라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관리’라는 의미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7 문무왕 14년(674) 정월조 기록에는 당나라 유인궤의 관직이 좌(左)서자로 나와 있다.

무호 최태영 교수는 환국의 역사적 실재를 입증하는, 변조되지 않은 『삼국유사』 두 가지를 처음으로 찾아냈다.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와 구사카 히로시(日下寛)가 일역하여 원문과 함께 도쿄대학 문과대 사지총서(史誌叢書) 1로 상한(上澣) 간행한 활자본 『교정 삼국유사』(1902)와, 경성 조선연구회에서 재발행된 『교정 삼국유사』(1916)가 그것이다. 이들 번역본에서는 『삼국유사』 원본과 마찬가지로 ‘석유환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변조에 개입했던 교토대학은 1921년 ‘석유환인’이라고 변조한 영인본을 발행했다. 이처럼 일제는 우리 상고사의 이어진 맥을 교묘하게 끊어버리려고 했다.

<출처: 일요서울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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