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를 쌓는다는 것은, 상호관계성을 기준으로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번뇌’라는 자기중심주의가 있는 한 자기 안의 세계를 혼자 뛰어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토진종의 가르침이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자기 밖에 존재하는 타자=절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절대자의 영성, 정토진종에서 말하는 아미타불 본원(本願)의 힘에 의해 눈이 뜨이고, 개별성 속의 보편성을 발견하며, 각자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부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더불어 현실 세계는 진실 세계를 안에 품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인간은 더 망설이는 일 없이 평화를 향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종교를 뛰어넘은 공통성이 여기에 있다. - 본문 35쪽
● 종교는 때로 시민들의 신념과 태도를 근본주의적으로 고착시켜 오히려 평화공존의 걸림돌이 되게 할 가능성이 있는 한편, 다른 한편 시민들을 양성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중시하고 모든 인간의 완성과 평화를 건설하는 평화 일꾼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종교가 가지는 평화구축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근본가치를 발굴하는 것은 종교인과 신앙인들의 사명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찰하는 지향적 가치는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이웃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라 여겨지는 것이다. 이 성찰은 종교 간의 대화가 더욱 진전되어 한스 큉이 제창한 세계 윤리(Welt Ethos)를 만들어 가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 본문 57쪽
● 남북의 평화통일 문제는 여전히 교착 상태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데탕트의 맛을 본 이상 이제 평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지고, 남북의 동질성을 향해 더욱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은 평화통일로 세계의 모순을 해결함과 동시에 세계평화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동반자로 세계사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시작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일 것이다. 외형으로는 국가의 기능을 빌리지만, 내적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통일국가 즉, 보다 친밀한 인간공동체인 동시에 보다 높은 정신세계를 구가하는 국가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통일은 지구의 묵은 원한을 해원하는 그 어떤 축제로 갈 것이다. 앞에서 말한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그 무엇이 한반도의 통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본문 107쪽
● 개운사 모델의 또 다른 축은 ‘종교전문가 학술토론형’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운사 훼불사건이 벌어졌을 때, 불당회복을 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불당을 회복함으로써 사건의 종결을 꾀하였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개운사 측에서 성금을 고사함으로써 개운사 모델은 시민참여형의 범위를 넓히게 된 것이다. 즉 개운사 측은 모금한 성금을 고사하면서, 훼불사건이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국민들이, 특히 종교인들이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임으로 종교의 이해를 넓히도록 하는데 그 성금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따라서 성금모금위원회는 종교평화를 위한 학술토론 모임인 ‘레페스포럼’(RePeS Forum: Religion+Peace+Study Forum)에 개운사 측 요구가 반영된 학술모임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며 목적사업기금으로 성금을 기탁하였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레페스 심포지엄’(RePeS Symposium)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갈퉁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종교 간의 ‘평등과 조화’를 추구하는 원리로 이해된다. 그래서 시민참여형이 ‘성처와 갈등 치유’에 맞춘 종교평화 모형이라면, ‘종교전문가 학술토론형’은 ‘평등과 조화’를 목적으로 한 종교평화 모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것은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욱 활성화될수록 종교평화 역량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처럼 ‘종교전문가 학술토론형’은 종교평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본문 216쪽
● 종교학계는 다양한 종교의 평화 개념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각종 학회나 글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 사회의 종교 간 갈등, 특히 이슬람 관련 혐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각 종교가 이웃 종교 혹 타종교에 관한 이해를 돕는 교육의 활성화가 필요하리라 본다. 기독교계는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포비아를 불식하기 위해교회교육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타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적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서 타자에 대한 공감 역량을 발달시키는 종교 본연의 교육 목적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 본문 307쪽
● 종교 및 종교계가 평화유지와 구축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론들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지구촌 한 지역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극복하는데 종교계의 역할이 있을 수 있다. 그것도 혐오와 편견이 종교적 옷을 입고 있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위에서 검토하였듯이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오랫동안 고정된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대표적인 고정관념들을 검토해본 결과 역사적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중동은 아랍이고, 이슬람 국가들이란 고정된 관념은 변경되어야만 한다. 이 지역 국가들은 각기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을 하나로 통칭하여 일반화하는 것은 인식의 폭력일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처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며 지배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중동지역의 전쟁과 테러리즘이 이슬람에 기인한다는 생각도 역사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지하드 개념은 이슬람의 중심 개념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희미했던 개념이었다. 이를 소환한 것은 이슬람 자신들이 아니라 서구에 의해서였다. 또한 이슬람 제국은 상대적으로 전쟁 중 비폭력적 사례들을 다수 남겼다. - 본문 332쪽
● 종교평화는 “평화다원주의”의 관점에서 대화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라는 인식, 저마다의 신념은 타자에 대한 긍정, 개성의 존중, 자유의 인정 안에서 타당해진다는 사실을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벡은 종교 근본주의의 폭력성이 자기 확장에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세계정복적 보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으며, 세계시민주의를 대안으로 삼는다. 세계시민주의는 사고방식과 공존 행위를 통해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이며, 종교의 다름의 인정이 종교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벡은 종교와 종교적인 것, 즉 명사인 종교와 형용사인 종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명사로서의 ‘종교’는 이것과 저것의 이항대립의 논리에 맞춰 종교 영역을 규정하지만, 형용사로서의 ‘종교적’은 세계 속에서 종교에 제기하는 실존적 질문에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형용사 ‘종교적’은 경계를 흐릿하게 하면서 포괄적이며 통합적인 대안을 상상하게 한다. - 본문 351쪽
● 한반도 평화를 열어줄 첫 열쇠는 역시 한국인과 한국 정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남북 모두에게 유리한 상생적 정책을 늘 고민해야 한다. 반북적 국제질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주로 ‘뾰족한’ 대응적 외교에 익숙해진 북한에게 한국이나 미국적 여유나 협의의 국제적 관례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는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 김정은 정권을 포함하여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리고 남과 북이 만나야 할 명분과 실리를 북한에 지속적으로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미국 사회 전체를 설득해야 한다. 미국은 특정 대통령의 나라가 아니다. 미국인의 나라이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력 언론에 평화를 위한 감동적 전면광고를 해야 한다. 여러 차례 해서라도 미국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가 중국의 한반도 개입 가능성을 줄여 동아시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미국에게도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북한을 통해서도 미국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 다수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본문 3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