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우라카와정(浦河町) 키네우스촌(杵臼村)에서 아버지 이수부(李秀夫)라는 조선인, 어머니 오가와 나츠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이 토미나 아이키치(富菜愛吉)의 마구간이었다는 것을 토미나 아이키치 씨에게서 후에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랫동안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 누이에게 물어 보니 아버지를 데리러 온 사람은 ‘스무 살 정도의 덩치 큰 청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둘이서 집의 허술한 부분을 고치곤 하면서 한 달 정도 함께 있었다고도 말했다. 누이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적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조선에 돌아간 후 한 번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본 적은 없다. - 본문 17-24쪽
● 사나에(早苗)와 결혼했을 때가 쇼와37년(1962), 내가 스물일곱일 때, 사나에가 스물 둘일 때이다. 개척단에 사나에의 숙부가 계셨는데, 형에게 “동생에게 여자가 있나?”라고 물었던 모양이다. ‘없다’는 대답을 듣고 이야기가 진척되었다. (69쪽) 사나에는 특히 아이누로서의 자각이 강했고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반은 사나에라고 할 수 있다. 사나에는 결혼식 다음 날부터 이쪽저쪽으로 야채를 팔러 다니는 등 일을 시작했다. 손님 상대가 능숙해서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 본문 73쪽
● 삿포로에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시계탑을 보러갔다. ‘삿포로 시의 새벽과 인구’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그중 ‘아이누는 있었으나 극소수’라는 기술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반감을 느꼈다. ‘삿포로에는 많은 아이누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삿포로에 우타리협회의 지부를 조직해야겠다는 결심이 강해졌다.(81쪽) … [쇼와46(1971)년] 12월 22일에 다시 한 번 결성총회를 했다. … 지부 발족 후 삿포로 거주 아이누의 생활 실태 조사는 사나에와 토요카와 씨의 부인 테루코 씨가 힘을 써 주었다. 이름, 주소, 가족 구성, 직업 등의 항목을 만들어 회원들로부터 들은 정보에 의지하여 사나에와 테루코 씨 등이 찾아다니곤 했다. 그즈음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 조사가 결정적으로 보탬이 되어 삿포로 권의 아이누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 본문 81-87쪽
● 한국에는 몇 차례 방문했다. … [두 번째 한국 방문] 도착한 다음 날에는 큰 박물관[천안 독립기념관]에 갔다. 그곳에는 일본군이 자행한 일들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함께 간 모두 깜짝 놀랐다. 예를 들면 갓난아기를 공중에 들어 올려 총검으로 찌르는 장면이 컬러로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설명원이 능숙한 일본어로 설명했다. 굉장히 진지하고 박력이 있었다. 일본의 가이드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종군위안부의 그림도 있었다. 보는 것 하나하나가 가슴에 꾸욱 와 닿아서 앞으로 갈 때마다 점점 나 자신이 작아졌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움직였다. 단장입니다,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박물관에 작은 꼬맹이들 30명 정도가 단체로 선생님들의 손에 이끌려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본문 120쪽
● 홋카이도립 케이세이(啓成) 고등학교 지리B의 수업에서 교사가, ‘아이누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라는 식의 표제를 칠판에 크게 썼습니다. 뒷자리에서 웃고 있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제대로 공부해라.” 교실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중략) “너희들은 이후에도 홋카이도에서 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누와의 결혼을 피할 것. (중략) 그렇기 때문에 구분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교실에 아이누 학생이 있어서 다음날 아침 9시에 학생과 부모가 생활관의 데스크 앞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나도 심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마침 모여 있던 본부의 세 책임자에게 전달하였고 놀란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무국장은 해당 학교장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 본문 146쪽
● 1995년(평성7), 홋카이도대학 문학부의 요시자키 마사카즈 교수가 퇴임하면서 후루카와 강당에 있던 연구실을 정리하게 되어 교수와 친한 아이누 청년이 도우러 갔다. 요시자키 교수는 이시카리의 모미지야마(紅葉山) 유적을 발굴할 때 이 청년과 알게 되어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리 도중 책장 위에 있던 박스 안에 사람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89쪽) … 이것이, 홋카이도대학 후루카와 강당 인골사건의 출발점이다. (190쪽) … 했다. “아이누인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그것은 홋카이도대에 치시마에서 발견된 유골 51구, 카라후토(사할린) 아이누 유골 91구가 있는데, 이번과 같이 그들의 고향에 유골을 돌려주기 위한 예비 조사를 위해 와 있는 것이다. 홋카이도대에는 아이누의 유골도 1000구나 있다. 잘 해결하고 싶다.” - 본문 192-193쪽
● 구 토인보호법 실행으로부터 110년, 홋카이도지사의 관리 이후 70년. 그 사이 이 법의 개정 검토는 네 번 있었는데 아이누민족 자신과 가족과 직결되는 권리 등은 전부 삭제하는 삭제의 향연이 펼쳐진 결과가 오늘날의 아이누민족에 대한 법률의 실태입니다. 아이누민족의 긍지를 회복시킨다고 문화법 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생물의 목숨에 관한 이오만테(아이누 마을에 방문한 카무이(곰과 올빼미 등)를 카무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제사. 아이누 문화에서의 최대의 제사)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문화입니다. 자연계의 생물, 인간 아이누, 카무이와의 사이에서 교환된 약속입니다. ‘생명을 본래의 자연에 돌려보낸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아이누민족이 태어난 것이며, 길고 긴 차별에 견뎌 온 에카시, 후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싹틀 수 있는 사업을 시행하고 함께 참가했을 때, 민족의 긍지란 이러한 시간에 걸쳐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 본문 228쪽
● 이것은 나의 마지막 싸움이다. [2012년(평성24) 9월 14일, 오가와 류키치, 죠노구치 유리 외 1명이, 평성20년 이후 홋카이도대로부터 개시된 ‘아이누민족 인골발굴대장’ 등으로부터 밝혀진 우라카와정 ‘키네우스’의 발굴 기록을 기반으로, 홋카이도대학에 대해, 유골반환과 선조의 제사를 방해당한 것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여 삿포로 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 전국에서 아이누의 인골이 1,635구나 소장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 본문 242-244쪽
● 본서의 저자이자 주인공 오가와 류키치 씨는 홋카이도의 선주민족인 아이누이자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이 된 두 민족-조선인과 아이누-사이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마이너리티로서의 ‘이중의 굴레’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 온 인물이다. 류키치 씨의 특수한 정체성과 그가 살아온 시대, 본서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일본과 한국, 그리고 넓게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때문에 본서는 한 사람의 자서전이자 동시에 우리가 꼭 알고 가야 할, 제국주의 시대에 희생되어 온 많은 이들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 본문 256쪽,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