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야누시 코르차크는 1878(/1879)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이 교육의 선구자·실험자·혁신가, 아동문학가(작가), 어린이를 위한 운동가, 어린이의 옹호자이며 어린이의 권리와 정의를 위한 급진적 혁명가, 어린이를 위한 철학자이자 이론가, 어린이 심리 전문가,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꾼이며 시인, 음악가이자 극작가 등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 모든 이름이 허사(虛辭)가 아니라 그의 실제 삶으로부터 정의된 것들이다.
그는 소아과 의사로서 평탄한 삶을 시작한 직후 한 어린이 단체에서 실시한 어린이 여름캠프 인솔자로 참여하면서 이러한 ‘어린이를 위한 삶’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여름 캠프에서 그는 “어린이를 교육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며 토론하고 중재하며 조정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교육자와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노력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p.40)”
이는 그의 어린이 존중이, 어린이에 대한 방임이 아니라 어린이를 한 인간 존재라는 것을 각성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는 이때 어린이를 ‘어른의 눈’으로 ‘어른의 언어’로서 이해하고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태도를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은 교육자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축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일임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어린이에게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함께 대화를 하”게 되었다(p.45)고 고백한다. 그것을 통해 코르차크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요구, 조건, 규정을 주장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에 더하여 코르차크는 “자연과학자”와 같은 엄밀함을 유지하며, 그가 어린이들과 지내며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을 기록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어린이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 배우고, 함께 살아감으로써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삶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위하여 코르차크는 어린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선의를 표방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예를 들어 다툼이 끊이지 않는 실상을 외면하지 않는 “현실적인 교육자”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동방 조선에서 방정환이 주도하여 1923년 ‘세계 최초의 어린이 해방선언’이라고 할 어린이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 훨씬 전부터 야누시 코르차크는 어린이 권리와 참여, 어린이를 위한 정의를 힘주어 강조하고 온몸으로 실천하고, 실현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교육철학의 기저 위에서 최초의 문학작품인 『거리의 어린이들』(1901)을 비롯한 여러 권의 동화와 소설, 『어린이를 사랑하는 법』, 『어린이의 존중받을 권리』를 비롯한 이론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작은 평론』) 등을 발행하였고, 무엇보다 <돔 시에로트(고아들의 집)>를 비롯한 고아원에서 실제로 어린이들과 함께 살며, ‘어린이 법정’을 통한 공화주의적인 혁명적 교육 프로그램을, 많은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성공적으로 실행해 냈다.
방정환이 스스로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오직 어린이를 위한 길을 내달리다가 결국 죽음의 절벽으로 떨어져 버린 것처럼, 코르차크는 어린이와 함께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수용소로 향하였다. 1942년 8월 5일(/6일), 야누시 코르차크는 그의 동료 교사들과 고아원의 190여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그가 머물던 게토 안에서 나치에 체포되었다. 그 이후 코르차크는 석방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하여 트레블링카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 장면은 전설과 실제가 어우러지며, 코르차크의 생애 전체와 그가 평생에 걸쳐 실험하고 실천해 온 어린이 교육의 정점으로, 그의 철학을 완성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실천들은 어린이 권리 선언이나 아동 교육학에 관한 현대적 전범을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며, 이러한 업적을 기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79년을 ‘세계 아동들의 해’로 기념하였고, 아동권리협약을 제정 공포하였다.
의사로서, 과학적인 지식과 견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코르차크는 모든 어린이를 신비로운 존재라고 알고, 믿고, 대우했다. 코르차크가 보기에 성인은 생각하는 사람인 반면, 어린이는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느낌은 어린이들이 온 몸과 마음으로 세계와 부딪쳐 얻어지는 것으로,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경험이며, 생명력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어른은 생각함으로써 예단하고, 예단함으로써 편견에 빠지는 존재인 반면에 어린이는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행동함으로써 경험하며, 경험하는 것으로 살아 있는 교육을 일구어 가는 존재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그렇게 코르차크는 어린이‘도’ 위하는 사람이고, 어린이‘에게도’ ‘정의’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코르차크는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했다.
■ 책 속으로
● 나는 이것이 현대 교육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순간 코르차크는 ‘교육은 교육자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축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일’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코르차크는 어린이를 양육하는 일이 (때로는) 힘든 작업임을 충분히 실감하였다. 왜냐하면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각각의 동기와 관심사를 가지며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생기는 ‘저항’은 교육자에게 부인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 본문 45쪽
● 코르차크의 접근법은 몇 가지 이유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첫째,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코르차크가 협상을 통해 어린이들이 비폭력적인 다른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 에피소드는 또한 코르차크가 ‘현실적인 교육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몸싸움과 말다툼이 있을 것이며, 어린이들이 (때때로) 싸우는 것은 일반적인 사건이고, 싸움을 금지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코르차크는 “나는 싸움을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육자인 나는 싸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해한다. 결코 나는 싸움을 경멸하지 않는다. 나는 싸움을 받아들인다.”라고 썼다. 물론 코르차크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회의를 통하여 단 한 번밖에 싸우지 않게 된 결과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을 것이다. - 본문 48쪽
● 코르차크와 스테파 그리고 200여 명의 어린이들이 트레블링카에서 독가스로 처형당했을 때, ‘하나의 전설’과 ‘하나의 순교자’가 탄생했다고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코르차크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도망갈 기회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코르차크를 심지어 성인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코르차크를 성인으로 받아들이게 된 첫 단계는 (놀랄 수도 있겠지만) 50년대 후반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점령기부터 말기까지 게토에 보관되고 있었던 코르차크의 일기장 사본이 회수되었다. 그 사본은 코르차크의 비서인 이고르 네벨리(Igor Newerly)가 벽돌로 벽을 만들어 숨긴 것이었다. - 본문 61쪽
● 코르차크의 교육제도를 논함에 있어 ‘어린이신문’인 『작은 평론(Mały Przegląd)』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이 최초의 독립신문의 씨앗은 1915년에 이미 뿌려졌다. 당시 코르차크는 전쟁으로 인해 키예프(Kiev)에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중요한 여인인 마리나 팔스카(Maryna Falska)를 만나게 된다. 첫 신문은 1919년 바르샤바에서 ‘그녀’가 운영하는 고아원 ‘나슈 돔(Nasz Dom)’에서 발행되었다. (코르차크는 돔 시에로트 고아원에 이어 이 고아원에서도 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문은 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연필로 기사를 쓴 공책이었다. 코르차크 자신은 계속해서 어린이에 대한 글을 썼고, 그의 글은 다른 어린이잡지에 실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이를 위한 잡지는 될지언정 ‘어린이에 의한 잡지’는 아니었다.- 본문 104쪽
● 어린이법정의 업무와 더불어 그 업무를 둘러싸고 이를 모두 가능하게 하는 법전, 회의록, 보고서 등이 상징하는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의심할 여지없이 ‘공공성’이다. 개개인의 이해 충돌은 후미진 뒷방이 아니라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다루어진다. 이를 코르차크가 교육자로서 성장하는 측면에서 해석해보면, 앞서 보았던 여름 캠프에서의 싸움과 같은 문제에 대처했던 것에 비하여 대단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여름 캠프에서 코르차크는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여 대립하는 진영 사이의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반면 고아원에서는 이 ‘중재자 역할’을 어린이법정이 맡게 하여 ‘공개적인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함에 따라, 어린이들의 충돌과 갈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완전히 새로운 해법을 제공하였다. - 본문 142쪽
● 코르차크는 ‘아동기’의 절대적 가치 혹은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틀림없는 인본주의 교육자였다. 어린이는 자신만의 욕구, 필요성, 욕망과 꿈이 있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대의와 관련되는 일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고 그는 믿었다. 어린이의 주체성에 대한 코르차크의 이러한 인식은 어린이에 대한 동경이나 숭배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존중으로 나아가는 교육학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