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종 전통의 창조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서로 공존하면서 생성해 낸 혼종성의 결과이며, 그것 자체가 한국 근대불교가 지닌 근대성의 현실(reality)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조계종 전통의 창조를 통해 서구에서 발전한 ‘불교(Buddhism)’의 ‘보편’에 대한 ‘특수(개별)’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했다. 또한 근대의 지평에서 전근대와 탈근대의 혼종적 성격을 지닌 ‘전통’을 창조했다. 오늘날 ‘조선불교조계종’을 계승한 ‘대한불교조계종’이 지닌 여러 복합적 성격은 그 혼종성의 구체적 예증이 될 수 있다. - 본문 42쪽
● 구한말 이래 유행하였던 사회진화론과 문명론은 불교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 잡지에도 이러한 언설이 폭넓게 반영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세계 종교에 대한 현황과 이해, 불교가 기독교에 대해 우월하다는 주장과 그에 대한 근거로서 불교가 철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언설이 제시되었다. 나아가 정체된 불교계에 대한 문제 인식과 함께 다양한 불교 개혁론이 제시되었다. - 본문 57~58쪽
●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 종교에 대한 비판 담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여러 면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종교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종교로, 문화 전통을 보존하는 종교로,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에 적합한 종교로 평가받았다. 시민들은 불교가 시대정신에 맞는 종교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이 같은 시민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바로 불교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불교 공동체의 문제다. 이 현실의 불교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재가의 종단 참여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재가불자들이 종단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개혁종단이 바라는 종단의 자주화와 민주화도,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도, 종단 권력의 안정적 제도화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한 한국 불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본문 158쪽
●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분류 체계의 관점에서 풀이해 보면, “분류 체계는 영원불변한 것일 수 없지만, 분류 체계가 없는 삶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 무욕(無欲)과 유욕(有欲), 경계선 너머의 묘함을 보는 것[觀其妙]과 경계선을 보는 것[觀其徼]을 대응시킨 것도 분류 체계의 차별상과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가 바리새파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율법이라는 분류 체계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의 고정화로 삶이 불필요하게 억압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원래 없던 구분선이 그어져서 분할이 생긴다는 것이고, 이는 항상 특정한 맥락에서 벌어진다. 일단 구분선이 만들어지면, 한편으로 그 분할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려는 힘이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분할 자체를 뒤엎어서 새로운 구분선을 만들려는 힘도 작동한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양방향 힘 모두에 지고의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성스러움에 관한 두 가지 이론이 잘 보여준다. 분류가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지만, 고정불변의 분류도 있을 수 없다. - 본문 201쪽
● 이중섭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했고 그는 늘 그 상극에 고민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선악을 모르는 아이처럼 순일하고 천연덕스럽다. 다시 말해 이중섭의 미는 선과 구별되지 않고 진과도 대립되지 않는다. 그에게 진선미는 하나였다. 그는 미이고 선이고 진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취약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섭에게 “선은 저 혼자 존재할 수 없다.”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 “선은 선악으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선은 악선으로 존재한다.”라고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서 문제되는 것은 선속에 잠재된 악(선악)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악 속에 잠재된 선(악선)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지상선으로서의 미적 기능’이라는 표현이 정합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섭에게 미는 어떤 도덕보다도 더 무자비하고 잔인한 초도덕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중섭을 ‘고흐의 환생’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 본문 216쪽
● 보수 개신교는 차별금지법을 비판하는 무기로서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다. 나아가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도 함께 제시한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러한 자유권들이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방송이나 신문 혹은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동성애의 죄악성을 지적하는 설교가 제한되고 일반 학교는 물론 미션스쿨과 신학교에서조차 성경에 근거해 동성애를 비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현실이 다가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 본문 280~281쪽
● 종교 연구란, 참으로 묘한 영역이다. 종종 이처럼 터무니없는 역학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종교 연구에 뜻을 둔 후배들을 위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기초를 마련하신 이민용 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들께 평소에도 필자는 경의를 품어 왔다. 더 나아가 불교를 연구하는 필자에게도 훌륭한 역할 모델이라고 여겨 왔으나, 실상은 개인적 역량 부족으로 부끄러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행여 오로지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한 연구나, 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한 연구만을 하지 않고, 누구나 기발한 주제와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 연구를 확장해 갈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종교계와 학계가 서로 건강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지,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현 이사장이신 이민용 선생님께도 찬찬히 여쭤볼 생각이다. - 본문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