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신접종에 회의적인 사람들 특히 부모들은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해 왔다. 이들의 생각은 Vaccination News라는 백신접종 반대 사이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사이트는 “일말의 가능성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해칠 뭔가를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부모들을 반대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태도는 백신접종과 위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심리적 현상, 즉 작위적 오류(errors of commission)보다 부작위의 오류(errors of omission)를 더욱 선호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면역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이를 더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반론은 (백신접종에 회의적인) 부모의 걱정과 불안 앞에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 본문 31쪽
● 20세기 전환기 주 정부 혹은 지방정부가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거주민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할 수 있는지는 해결되지 못한 난제로 남았다. 백신접종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수십 건의 소송은 전국의 법정에서 수많은 판결을 낳았다. 대부분의 판결은 강제적 백신접종 법안을 옹호하는 것이었고, 특히나 학교 입학 조건에 이를 적용했다. 그렇지만 브루클린 보건 당국을 상대로 한 윌리엄 스미스의 소송과 같은 예외적인 판결도 있었다. 스미스 사건과 같은 여러 사례는 주 입법부가 강제적 조치를 특별히 승인할지 여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런 대립된 의견들은, 전염병을 통제하기 위해 광범위한 경찰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 정부 및 지방정부의 권한을 확실히 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의 배경이 되었다. - 본문 88쪽
● 과학과 정통 의학에 대한 의심, 그리고 개개인의 행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반대하는 반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백신접종 반대론자들에게 공통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이런 표면적인 유사함 뒤에는 각각의 배경과 전망에 있어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당시 공중보건 관료들은 보통 백신접종 반대론을 균질적인 운동으로 이해하면서 ‘반대론자들(the anti’s)’이라고 경멸하듯 불렀고 대중매체 논평자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 시기 전국에 걸쳐 일어난 백신접종 반대 운동을 하나의 통합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20세기 초 백신접종 반대 운동은 믿음·전략·목적 등에서 서로 다른 각양각색의 비균질적인 개인과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본문 111쪽
● 백신접종을 반대하면서 대안적인 공중보건 방침을 옹호한 사람들 역시 점점 사그라지는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1920년대 말 전국적으로 시행된 조사에 따르면, 척추지압사,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 그리고 약을 사용하지 않고 믿음으로 치료하는 사람들 등 대체의료 행위자들은 전국 모든 환자 중 고작 5% 정도만 치료할 뿐이었다. 이 시기 대증요법 의학은 다른 형태의 의학과 비교하여 문화적 위상이나 권위 측면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보건에 관한 대중의 의사 결정에 의사들의 권고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질병들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백신접종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본문 153쪽
● 백신접종의 위험성을 점점 더 인지하게 되면서 이를 거부하는 정서가 커진 반면, 궁극적으로 미국에서 정기적인 천연두 백신접종을 중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전 세계적인 천연두 박멸 캠페인의 급속한 진전이었다. 이 캠페인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1967년 당시, 33개국이 천연두 발병을 보고했다. 1970년까지 14개국으로 줄었고, 1971년 중반까지 이 질병은 서아프리카나 중앙아프리카, 인도 대륙의 9개 나라에만 국한되었다. 이 질병의 위험성이 급격히 줄어들자, 그 질병에 대한 백신의 위험을 더 이상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1971년 9월, 백신접종자문위원회는 새로운 입장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오늘날 천연두 백신을 비선택적으로 접종하는 방식은 미국 대중의 상당수를 백신접종 합병증의 위험에 불필요하게 노출시키고 있는데, 이는 천연두에 걸릴 확률보다 더 큰 위험’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보건 당국은 백신접종을 시행하는 “강제 조치의 중단을 고려해야 했다.” 그다음 달, 백신접종에 관한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자문기관인 미국소아과학회 전염병위원회는 백신접종자문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미국에서 일상적인 천연두 백신접종 시대는 막을 내렸다. - 본문 306쪽
● 신종플루 사건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대중들이 백신접종을 수용하려는 태도에 미친 영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스며나오기 시작한 백신 관련 피해에 대한 책임 문제 그리고 정보에 입각한 자발적 동의 문제가 백신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떠올랐다. 1976년 말과 1977년 초, 수포로 돌아간 신종플루 프로그램 이후, 보건교육복지부는 학자들, 보건 관계자들, 백신 제조업체와 소비자 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그룹들을 소집하여 재정 및 공급, 공교육, 책임 및 사전 동의를 포함한 주요 정책 분야에 대한 권고안을 준비했다. - 본문 361쪽
● 거의 한 세기 중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백신접종 반대 운동의 등장은 2001년 9월 테러 공격 이후 강렬해진 역사적 기시감을 만들었다. 천연두가 생물학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직면하면서 과학자, 정치인 및 대중들은 격리, 검역 및 경찰 권력의 제한 등이 백신접종 정책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던 19세기 이래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문제들과 싸우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과학적 증거뿐만 아니라 시민문화 및 정치문화의 근본적인 특징들이 백신접종을 둘러싼 의사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었다. - 본문 399쪽
● 1990년대에 백신접종에 대한 반대 의견이 퍼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이었는데, 인터넷은 특히 의료 및 의료와 관련된 지식을 평준화하는 힘이 되었다. 2002년까지 수십 개의 웹 사이트가 백신접종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에 도전하고 있었고, 온라인 게시판은 반체제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그 결과, 부모들은 질병통제예방센터 및 미국소아과학회와 같은 공식 출처에서 백신 권장 자료를 접하는 것 외에도 스스로 온라인 검색을 통해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백신으로 피해를 입은 어린이의 끔찍한 사진과 설명을 보여주거나 의료계를 탐욕스러운 제약업체 및 부패한 보건 관료와 결탁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백신을 더욱더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이트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어머니는 인터넷 검색 엔진을 사용한 경험에 대해 “저는 방금 ‘백신’이라는 단어를 입력했고, 화면에 뜬 모든 것은 백신 반대 자료들이었습니다.”라고 <컨슈머 리포트>(Consumer Reports)에 말했다. 한 분석에 따르면, 20년 전 DPT 논쟁보다 더 빠르게 미국에서 MMR 백신과 자폐증 사이에 추정된 연관성에 대해 논란이 촉발된 것은 인터넷의 성장 때문이었다. - 본문 4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