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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통문 019] 아나바다의 다시개벽 - 해월, 쉬지 않는 한울님의 이면 / 지구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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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저술된 <천도교창건사>(이돈화 저)는 천도교 역사서로서는 비교적 후대에 지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앞선 시기의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설화적 요소'가 다분하여, 그 사료적 가치를 의심 받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구전이든 창작이든 동학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도교창건사에만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로, "해월의 노끈 꼬기"가 있습니다. 보통은 '새끼(줄) 꼬기'로 알려져 있는데, 최초(?) 기록인 <천도교창건사>에는 '노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 해월은 길을 떠날 때 반드시 봇짐을 두 번 쌌는데, 이는 만사에 자세하게 하심이다 (2) 봇짐 위에는 반드시 여분의 짚신을 마련했고, 봇짐 안에는 비상식량[點心]을 준비했는데, 이는 위난(危難)에 쫓기는 처지를 고려한 것이며 (3) 어느 제자 집에 기숙하든 항상 주문을 외웠으며 (4) 낮잠을 자거나 빈손으로 무료하게 있는 법이 없고 반드시 짚신을 삼으며 또는 노끈을 꼬거나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고 보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서 꼬았다고 하는 이야기 마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꼬았던 노끈을 다시 꼬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해월은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씷어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한울님은 잠시도 쉬지 않는데, 사람이 어찌 한시라도 쉴 수 있으리오."라는 말로도 전해집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있는데, 해월은 길어야 석 달 정도를 한 곳에 머물렀는데, 새로 들어간 집에는 항상 (과일)나무를 심고, 겨울이면 멍석을 내었다(엮었다)고 하며, 제자들이 언제 딴 곳으로 이사 갈지 모르는데 나무는 왜 심고 멍석은 왜 내는가를 물으보면, "이 집에 이사 오는 사람이 과실을 먹고 이 물건을 쓴들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느나. 만약 세상 사람이 다 나와 같으면 이사 다닐 때에 가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느니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끈 꼬는 이야기와 (과일)나무 심고, 멍석 내는 이야기는 오늘 "경물 - 신유물론"의 시대에 새롭게 읽게 됩니다. 우선 노끈을 다시 꼬는 일은 '재활용'과 관련됩니다. '꼬았던 노끈'을 다시 꼬는 것은 기왕에 꼰 노끈을 더 튼튼하게 꼬는 것이거나, 꼰 지 꽤 시간이 지나 느슨해진 노끈을 '수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토막난 노끈을 풀어서 다시 긴 노끈으로 이어서 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끈은 '새끼로 꼰 새끼줄'과 달리 실, 삼, 종이 등을 비비거나 꼬아서 만든 것인 만큼, 새끼줄보다는 귀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이것을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하고, 튼튼하게 수선해서 더 요긴하게 쓰는 데에 '노끈 꼬는 해월'의 마음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경물의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입니다. 

앞선 글에서, '모들카페' 내의 '아나바다' 운동을 소박하게 제창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생각하면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일)나무 심기나 멍석 내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설화들은 그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한울님"의 의미로만 읽어 왔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 하고, 그런 점은 한울님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오늘의 세계는 '일함이 부족'해서 문젝 아니라, '과로'가 문제가 되고 '쉼 없이 돌아감'이 문제가 되는 사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월의 '노끈 꼬기' '나무 심기'는 '일하기의 철학'이 아니라, '되새김질의 철학' '휴식의 철학' '여유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게 옳습니다.(이런 점에서 저는 '일하는 한울님'은 다시 '일하지 않는 한울님'이기도 하다는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 전통의 민중 사회는 '아나바다'가 일상화된, 상식화된 사회였다고 상상됩니다. 지금의 5, 60대가 어렸을 적만 해도 (시골) 집안 살립살이 가운데 버려지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쳐쓰고, 이어쓰고, 물려주고, 살려쓰는 게 보통이었고, 쓰다 쓰다 못 쓰게 되면 땔감이나 두엄으로라도 재활용해서 쓰고 또 썼지요. 경물의 한 의미는 이처럼, 한 물건 속에서 그 쓸모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재활성화하는 것으로 달성되는 것입니다. 경물을 한다고 하여 그것을 우상화하자는 게 아닌 것은 다 아는 일이요겠지만. 

그러므로, 지금 동학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경물-사물을 공경'하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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