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전시회를 연 80대 할머니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집니다. 우선은 작은 거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분일 듯 싶습니다. 그리고 무척 성격이 꼼꼼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저의 감인데 역사에 대한 인식이 무척 투철한 분이지 않을까 합니다. 역사 인식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끊고 버리는 단샤리(斷捨離)라든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든가 하는 미니멀 라이프 등의 생활방식이 유행이죠. 개인으로서는 무척이나 본받고 싶은 바람직한 모델이지만, 한편으로 단지 일개인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기억을 남겨야 하는 입장이라면요? 모두가 미니멀리스트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도 기억도 지금보다는 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바로 원불교의 구타원(九陀圓) 이공주(李共珠, 1896∼1991) 종사입니다. 구타원은 과연 어렸을 적부터 수집벽이 있었다고 하네요. 풀잎으로 각시처럼 꾸민 인형을 만들어 노는 각시놀음은 질리면 금방 버릴 만도 한데, 예쁘게 애써 꾸며 놓은 것은 버리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수집에 대한 열정은 타고난 것임을 알겠습니다.
구타원은 전북에 원불교 총부가 생긴 1924년부터 교단에 몸담았습니다. 무엇 하나 소홀하게 여기는 법 없었던 구타원은 그때부터 수많은 자료를 차근차근 모았으며, 기록하지 않았으면 흩어져 버렸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 대종사의 법설을 비롯한 교단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남겼습니다. 구타원은 전시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망을 밝힙니다. “이 소장품들은 장차 수도원 박물관에 전시하여 후진들에게 교단사와 세계의 풍물을 알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먼 후일 총부에 종합박물관이 설립되면 그곳으로 옮겨 소장 전시하기를 바란다.”( 『원불교신문』 「구타원 이공주 법사 소장품」, 1978.6.25.) 이는 그가 교단사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음을 보여줍니다.
구타원은 1934년부터 연구부장과 통신부장을 겸직하며 『회보』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1935년 1월 13호에 이르러서 구타원이 주간을 맡았습니다. 『회보』와 같은 기관지의 발행을 통해 비로소 교단의 크고작은 일들이 정기적으로 기록되고 교단의 구성원들에게 공유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타원은 『회보』에 실릴 원고를 집필, 편집, 교정하는 동시에 발행비용을 부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구타원은 『회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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