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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칼럼 014] 구타원 이공주, 역사를 수집하다 / 박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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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한 신문에 「80고령 할머니의 이색취미 성냥갑 60년전」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끈 바 있습니다. 한남동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라스베이가스의 듄이라는 이름없는 호텔의 것에서부터 동경 미쓰꼬시 백화점앞 대정 고기점, 서울변두리의 주유소에서 구한 성냥갑까지 별별곳의 성냥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하네요. 성냥갑이 무려 6천 개, 정확하게는 5,999개라고 합니다. 성냥갑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표도 1884년 구한말의 오문(五文) 우표뿐 아니라 보통우표, 기념우표, 연하우표, 부가금우표, 항공우표 등의 국내 우표가 1,473장, 외국 우표가 3,972장이 있다고 하네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예맨, 바레인, 카타르, 아즈만 등 당시 이름도 들어보기 어려웠던 국가의 우표들이 세계지도와 함께 첨부되었는데, “아, 이 나라는 여기에 있구나”하며 대조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사설, 사진, 칼럼과 특집 등의 신문스크랩, 원불교 63년간의 교사가 담긴 사진첩, 2백 여장의 페넌트, 1,500장의 연하장, 30여 년간의 달력 등까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구타원 법사 소장품 전시회>

해당 전시회를 연 80대 할머니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집니다. 우선은 작은 거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분일 듯 싶습니다. 그리고 무척 성격이 꼼꼼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저의 감인데 역사에 대한 인식이 무척 투철한 분이지 않을까 합니다. 역사 인식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끊고 버리는 단샤리(斷捨離)라든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든가 하는 미니멀 라이프 등의 생활방식이 유행이죠. 개인으로서는 무척이나 본받고 싶은 바람직한 모델이지만, 한편으로 단지 일개인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기억을 남겨야 하는 입장이라면요? 모두가 미니멀리스트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도 기억도 지금보다는 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바로 원불교의 구타원(九陀圓) 이공주(李共珠, 1896∼1991) 종사입니다. 구타원은 과연 어렸을 적부터 수집벽이 있었다고 하네요. 풀잎으로 각시처럼 꾸민 인형을 만들어 노는 각시놀음은 질리면 금방 버릴 만도 한데, 예쁘게 애써 꾸며 놓은 것은 버리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수집에 대한 열정은 타고난 것임을 알겠습니다. 


구타원은 전북에 원불교 총부가 생긴 1924년부터 교단에 몸담았습니다. 무엇 하나 소홀하게 여기는 법 없었던 구타원은 그때부터 수많은 자료를 차근차근 모았으며, 기록하지 않았으면 흩어져 버렸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 대종사의 법설을 비롯한 교단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남겼습니다. 구타원은 전시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망을 밝힙니다. “이 소장품들은 장차 수도원 박물관에 전시하여 후진들에게 교단사와 세계의 풍물을 알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먼 후일 총부에 종합박물관이 설립되면 그곳으로 옮겨 소장 전시하기를 바란다.”( 『원불교신문』 「구타원 이공주 법사 소장품」, 1978.6.25.) 이는 그가 교단사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음을 보여줍니다.


구타원은 1934년부터 연구부장과 통신부장을 겸직하며 『회보』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1935년 1월 13호에 이르러서 구타원이 주간을 맡았습니다. 『회보』와 같은 기관지의 발행을 통해 비로소 교단의 크고작은 일들이 정기적으로 기록되고 교단의 구성원들에게 공유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타원은 『회보』에 실릴 원고를 집필, 편집, 교정하는 동시에 발행비용을 부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구타원은 『회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회보」 제 13호부터 내가 주간이 되어 7년 동안 65호까지 인쇄판으로 펴냈다. 교단의 모든 소식과 대종사님의 법설이 수록된 「회보」는 교단 유일의 정기간행물이었으며 통신수단 이별로 발달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대단히 중대한 정보지이기도 했다. 나는 주간으로서 대종사님 법설 수필과 편집 교정 등을 보면서 발행비용까지 담당하였다. 단순한 간행물이 아니었던 「회보」는 간접교화의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재가 출가 교도들에게 신앙과 수행의 길잡이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 그러나 우리의 뜻이 오직 중생구원이라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온갖 억압에도 주저하는 바 없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대종사님 법설을 비롯, 시가 논문 감각감상 번역 부처님 전기 육조대사전기 동서미담 일화 등을 실었다.

                                

(『원불교신문』, 「구도역정기187」, 1988.4.26.)

                

『회보』는 당시 원불교 교단 내의 유일한 정기간행물로서 중대한 정보지의 역할을 했으며, 교단소식과 소태산의 법설이 수록되어 있었기에 ‘신앙과 수행의 길잡이’로서 간접교화의 역할까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원불교잡지의 발간은 소태산의 문화의식에 힘입은 것으로, 기록을 통한 교단사의 정리 목적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북 총부 초기 교단에서의 생활상과 논설 등이 오롯하게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태산으로부터 법낭(法囊)이란 아호를 얻을 정도로 소태산의 법문을 잘 갈무리하여 잡지에 실렸던 구타원의 법문 수필은 『정전』, 『대종경』 등에 채용되어 그 기록의 힘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는 일반 책에 비해 시의성이 강하기에 오래 보관하는 일이 잘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돌려 보는 문화가 강했는데, 이 과정에서 금방 사라져버리기 일쑤였을 것입니다. 원불교 교단의 『월말통신』, 『월보』, 『회보』는 발행부수도 적고 구람(購覽) 범위도 좁았으니 여타의 신문잡지보다 더 사라지기 쉬웠을 것이고, 교단역사에 있어 큰 공백을 남겼을 터입니다. 그러나 이들 원불교잡지들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서 교단 및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 자료들을 『동아일보』를 창간호부터 꼼꼼하게 수집했던 구타원답게 서울에서부터 잘 갈무리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보관 역시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원불교의 역사는 구타원이 아니었으면 지금과 같은 굳건한 모습이 아닌,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구타원은 이외에도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평생 동안의 일기(『구타원 이공주종사 소장 원불교교단사 자료집성』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등 거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에 대해 나중 또 소개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 글은 2022 세계종교포럼에서 필자가 발표한 “구타원 이공주와 원불교 초기 교단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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