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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칼럼 009] 하생(何生), 점 보러 가다 / 박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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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가 복잡합니다. 변화는 빠르고 선택할 길은 많습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말처럼 수 갈래, 수십 갈래로 갈라진 길들을 앞에 두고 양을 잃어버린 사람마냥 우두커니 바라볼 뿐. 도대체 어느 길에 양이 있을까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 나온 길은 두 갈래인데, 시적화자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로 가야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까지 두고두고 뇌리에 남을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덜 지나간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장래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라 한숨지으며 말할 것이라고 하네요. 사족입니다만 신형철 교수는 두 길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며, 올바른 선택이란 없으니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라고 독해합니다.

 

두 갈래 길도 그럴지언대 하물며 선택 가능한 무한한 길들은 어떠할까요. 평행우주론에서는 각각의 길로 향한 우주가 무수히 생겨나겠지만요. 그렇지만 각 우주의 ‘나’들은 또다른 우주의 ‘나’에 대해 전혀 상호간 정보를 소통할 방법이 없으니 이 역시 번뇌는 오롯이 남게 될 겁니다. 

 

이런 미래를 결정할 선택에 대해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때로는 점(占)을 보기도 합니다. 20세기 들어서며 사람들은 점에 대해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곧 사양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인터넷 등의 여러 발전한 기술에 힘입어 점은 여전히 그 지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거에 비해 현재가 선택에 대한 어려움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강연을 찾아다니며 멘토를 구하고, 자기계발서와 유튜브를 보며 롤모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점도 보게 되는 것이죠. 

 

점은 어떠한 초월적 존재 내지는 원리에 따라 메시지를 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수용은 개인에 달려 있으며, 재미 삼아 상담 삼아 봐도 무관합니다. 스마트폰 앱으로 간단하게 열어서 보기도 하고, 유튜브로 띠별, 별자리별 운세를 보기도 합니다. 직접 점집에 가서 볼 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점괘가 나왔을 경우, 잘 나올 때까지 여러 곳에 가서 보는 경우도 있지요. 요새 표현으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식으로요. 현대의 점은 가볍게 즐기며 스트레스를 덜어낼 수 있는 한 방편입니다.

 

과거에는 어떠했을까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촉탁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은 자연관상점(自然觀象占), 동물, 식물 기타 사물에 의한 상복(相卜), 몽점(夢占), 신비점(神秘占), 인위점(人爲占), 작괘점(作卦占), 관상점(觀相占), 상지법(相地法) 등의 유형으로 나누어 다종다양한 역대로부터의 한국의 점복법을 보여주었는데, 현대보다 훨씬 점의 수요가 컸다는 점을 알게 해 줍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신분제의 질고, 자연재해, 병고 등에 시달렸던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있어 삶의 괴로움은 항시 수반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삶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에서 당시에 점복은 빈번하게 행해졌을 것입니다.

 

관련하여 16세기의 한 고소설을 보고자 합니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의 『기재기이(企齋記異)』에 수록되어 있는 「하생기우전(何生奇遇傳)」입니다. 

 

고려 때 하생(何生)이란 이가 있었는데, 가난한 집안의 고아였습니다. 그렇지만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마침내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국학에서는 그와 맞설 자가 없었고, 장원급제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을 정도로 자신만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은 어지러웠고, 인재 선발이 능력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하생은 항상 불만스러워하며 울적하게 지냈습니다. 

 

이에 하생은 낙타교에 일의 결과를 날짜까지 맞추는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주역을 보게 됩니다. 점쟁이는 하생이 본래 부귀를 누리게 되어 있지만 오늘이 매우 불길하다고 합니다. 본괘(本卦)로 지화명이괘(地火明夷卦: ䷣)를, 이에 대한 지괘(之卦)로 풍화가인괘(風火家人卦: ䷤)를 얻은 것입니다. 지괘는 변괘(變卦)라고도 하는데, 보통 본괘에서 효가 바뀌어 생기는 괘를 말합니다. 

 

이 경우에 대해 해당 효사를 보는 등 여러 풀이방식이 있지만 일단 「하생기우전」 안에서는 “명이(明夷)는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상이고, 가인(家人)은 유인(幽人)의 정숙함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明夷者, 明入地中之象. 家人者, 利見幽人之貞.]”라 하고는 도성 남문을 나가 멀리 떠나되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오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액땜도 하고 좋은 배필도 얻게 될 것이라고요. 

 

하생은 이 말에 따라 남문을 벗어나게 되고, 어느덧 깊은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집을 발견하고는 그 집의 시녀를 통해 서로 시를 주고 받습니다. 과거에는 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 소설 역시도 그러한 클리셰를 따릅니다. 둘은 결국 사랑하게 되는데, 다음날 새벽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이 밝혀지게 됩니다. 

 

곧 여인은 죽은 지 사흘된, 일종의 혼령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많이 해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보로 그 자식들이 죽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뒤 아버지가 죄 없는 사람들을 살려 여인은 옥황상제로부터 다시 살게 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그날까지가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한이었습니다. 이에 하생에게 금척(金尺)을 큰 절 앞의 하마석(下馬石)에 놓아달라 부탁하게 됩니다. 

 

하생은 여인이 말한 대로 행동하지만, 그 물건은 사실 그 여인이 묻힌 무덤의 부장품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생은 부장품을 훔친 도둑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어 일종의 혼사장애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생은 곤욕에도 꿋꿋이 버티었고, 결국 여인은 무덤에서 다시금 살아나 둘이 서로 결혼해서 해피엔딩을 맞게 됩니다. 이에 예전의 점쟁이를 찾게 되지만 이미 떠나고 없었다고 하네요. 

 

여기서 점은 행동의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점복의 세계관에서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이 역시 행동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날이 지나가면 영영 죽게 될 여인을 하룻밤만에 찾아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그날 점을 본 것이 제일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점괘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매력을 지녔으며, 그 과정에서의 고난을 자신의 평소 성품대로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점이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맞지만, 나머지는 그 사람됨됨이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16세기 당시 조선사회에는 읽을거리가 많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해당 소설은 그 흥미진진함 때문에 필사되어 읽히는 등 많은 인기를 얻은 듯합니다. 형편에 어려움을 겪고, 기회를 얻지 못해 울분에 찬 청년들도 혹 근방에 용한 점쟁이가 없나 수소문하러 다녔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생과 같은 기우(奇遇)를 얻어 인생역전을 이루길 꿈꾸면서요. 시대는 달라졌지만 이런 마음은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인생을 바꿀 것이라 믿으며, 선택에 있어 점과 같은 작은 도움을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혹자는 비과학적이라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준다면 O.K.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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