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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강좌 008] 또 다른 문명이 있어야 한다 / 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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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회에서는 포덕문 3절과 4절을 심고합니다. 

 

  〔원문〕 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 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 敬天命而順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 修其德 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3절)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4절)

  〔천도교경전 풀이〕 오제 후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이하 포덕문 3절로 표기)

또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사람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이하 포덕문 4절로 표기) 

 

  지난 일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살피기 위함이다. 3절의 문장만을 축약해 풀이하면 ‘천도를 깨달은 이들이 나와 문명시대가 열렸으니 기쁜 일이다’로 압축할 수 있다. 이 자리서 천명, 천리, 천도, 천덕을 논하는 것을 불필요하다.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동학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 필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3절에서 필자는 한 가지만 다루려 한다. 수운이 이전 시대를 어떻게 봤는가 하는 점이다. 수운 이전에도 천도는 우주 탄생과 함께 있었다. 수운의 천도는 이를 다시 받은 것이다. 수운은 문명개벽시대를 예찬하는데 수운이 천도를 다시 받게 되는 일은 왜 생겼을까? 서학이 침입하고 성리학이 파탄나는 짧은 국면 동안 천도가 어지러워져서 수운이 다시개벽하는 천도를 말한 것인가? 즉 근래에 이르서야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것인)가”(용담유사 교훈가) 그렇다면 종래의 학(學)을 조금만 수정해도 되는 것 아닌가? 사실 도올은 온갖 말로 수운을 칭송하지만 그의 칭송은 성리학 2.0을 훌륭하게 만들었기에 하는 칭송이다. 이 점은 나중에 상세히 밝히겠다. 

 

  도올은 포덕문 3절을 ‘긍정적 사태’(도올 동경대전2 66쪽)의 진술이라고 하고, “오늘을 밝게 하기 위해 어제를 어둡게 만들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수운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요, 여느 종교가들과는 구획되는 특출한 사상가로서 그를 부각시키키고 있는 것이다......수운의 문제 의식은 지금 여기”(위 책 68쪽)라고 한다. 정리하면 과거문명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 문제라는 것이다. 도올은 논학문 3절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어고급금 기중미필자야)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니라.”의 ‘미필未必’을 “그것은 서학(서양의 모든 학문)이 어떤 개구라를 피워도,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운이 서학에 대해서 한 총귀결이다.”(위의 책 114쪽)고 한다. 도올은 수운의 동경대전 풀이에서 수운이 성리학과도 치열하게 대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단 한 획도 쓰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오심즉여심’을 성리학의 ‘천인합일’과 같다고 한다. 

 

  글로만 보면 포덕문 3절은 도올의 말대로 긍적적 사태의 진술이다. 과연 그런가? ‘지금’이 문제라면 지금을 만든 과거는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 수운은 혼돈한 지금을 보며 왜 그런가 치열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과거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올처럼 해석하면 천도는 유불선도로 나타나 문명시대를 열어 왔는데 근래에 그 수명이 다해서 천도를 다시개벽하여 동학을 만든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수운의 하늘님은 오만 년 동안 공이 없다는 노이무공이었다. 「포덕문」 6절에서는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용담유사』 「용담가」에서는 “개벽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라고 한다. 잠깐 세상이 안 좋아져서 그런다면 오만 년 동안 한울님이 공이 없다는 ‘노이무공’이라 할 리가 없다. 노이무공은 포덕문 3절의 표현과 배치된다. 이 역설적인 진술을 ‘불연기연’과 같은 수운의 독특한 글쓰기와 동경대전 전체의 맥락에서 들여다 봐야 한다. 

 

  수운의 포덕문 3절은 과거 문명 전체를 싹쓸이로 청산 부정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다’로 읽어야 한다. 그 관건적 핵심어는 포덕문 4절 ‘우又’다. 도올은 ‘우’를 “사람의 마음이 병든 현상이 과거에도 있었는데 지금이 특별히 심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위 책 69쪽) 도올의 ‘우’ 풀이의 강조는 역시 ‘지금’이다. 도올 뿐 아니라 동경대전을 풀이하는 다른 글도 이 ‘우’를 ‘또 근래에 이르러’ 정도로 풀이한다. 필자는 ‘우’ 풀이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줄 알았더니”, “달리 생각하면”으로 풀어야 한다고 본다. 

 

  ‘우차만근이래“(又此挽近以來)는 ‘근래에 이르러 세상 사람들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근래에 이르러 내(수운)가 달리 생각해보니 세상 사람들은 전부터도 천리를 순종치 않더라.”고 보아야 한다. 뜻이 정 반대로 된다. 그래야 ’노이무공‘이 제대로 풀린다. 논학문 3절의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어고급금 기중미필자야)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니라.”, 용담유사 교훈가의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것인)가”, 수덕문 9절의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 (수심정기 유아지갱정 修心正氣 惟我之更定)도 이해가 된다. ‘수심정기’를 수련수양의 요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은데 종래의 ‘리理’ 중심의 세계관을 ‘기氣’ 중심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람들의 사유체계 근본을 수운은 전복한 것이다. 이 점도 때가 되면 상세히 논하겠다.

  ‘우’에 대한 해석의 열쇠는 포덕문 6절의 “기형태극 우형궁궁”(其形太極 又形弓弓)이다. 동학천도교인들이 ‘우형’에 대해서 주목한 글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도올은 ‘우형’을 그의 저서에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지하는 ‘우형’을 호로 쓰기도 하였다. 그는 ‘우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글 여러 곳에서 ‘카오스모스’ 등과 관련하여 발언하였다. 이 ‘우형’을 “또 다른 세상 Another world”으로 본격 주목한 것은 생명사상연구소의 주요섭이다. 그는 각주2)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또 다른 생명의 세계관을 설정해본다. 세계는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몸’의 역동으로, ‘생/명’활동으로 살아있다. 동학의 언어를 빌리면,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의 생명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은 일차적으로 영어 another의 번역어이다. Another world is possible의 그 another이다. ‘또 하나의’로 옮겨질 수도 있다. 개념적으로는 ‘또 다른 형식(form)의 구성’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우형(又形)’이다. 그러므로 항상 다른 형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세계는 세계들이며, 생명사상은 항상 생명사상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여기서 ‘또 다른’은 ‘자기-변환적’이다. 별개의 다원적인 것들이 아니라, 애벌레-나비와 같이 변태(metamorphosis)이거나 분화(differentiation)이다.”  - 주요섭 「‘몸-생/명’의 세계관, 저항과 꿈꾸기의 생명운동」, 2021, 모심과 살림연구소 -

 

  이렇게 볼 때 포덕문 3절과 4절은 동학 창도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도올이 말한 바의 서학과의 치열한 대결만이 아니라 종래 중국과 조선의 학들과도 치열하게 대결하여 “또 다른 세상”을 지향한 것이다. 여기서 ‘또’는 강조와 대칭의 의미다. 그것은 학으로 말하면 ‘리’에서 ‘기’ 주체로 전환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포덕문 3~4절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오제 후부터 문명세계가 열렸으나 내(수운)가 근래에 생각해 보니 각자위심할 수밖에 없는 문명이 되고 말았다. (근래에만 각자위심하는 것이 아니다.)” 구구절절 문장의 각 구절들을 해설할 필요는 없다. 기왕의 풀이들이 훌륭하다. 포덕문 3,4절은 동학 창도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종래의 성리학이나 노자를 (일부라도) 부정할 수 없는 도올의 입장에서는 동학 창도의 이유를 서학과의 대결에서만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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