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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다시개벽

[권두언-제1호] 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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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최근 한국의 지식 담론 장에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서구에서 한참 전에 논의되었던 것을 이제 와서 새로운 유행인 줄로 알고 뒤늦게 따라잡는 꼴이다. 서구 이론의 역사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구조주의가 풍미하였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포스트구조주의가 성행하였다. 그 뒤를 이어 2000년대에 서구 학계의 화제를 모은 담론이 신유물론이다. 한국에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매순간 동시적으로 움직이는 오늘날에 20여 년의 격차를 둔 유행 이론의 수입이 여전하다는 것은 깊은 반성을 요하는 문제다.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촛불혁명과 박근혜 탄핵)와 새로운 문화(오스카가 ‘로컬’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 봉준호의 <기생충>)를 제시하며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때에, 유독 사상의 측면에서는 ‘서구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의 일방적 답습을 면치 못한다. 신유물론의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서구 이론과 한국 지식 담론 장 사이에 견고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다. 개항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거의 모든 지식 담론이 그러한 방식으로 수입되었다. 한국의 지식인은 이론을 수입하는 보따리장수 노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시개벽] 창간호는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도모하는 여름호의 출발점으로서, ‘서구 근대 백여 년도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주제를 마련하였다. 수운 최제우는 [용담유사]의 <교훈가>에서 “유도(儒道) 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말했다. 아시아 문명에서 유교와 불교는 고구려‧백제‧신라 시대와 같은 고대부터 조선 시대와 같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사대주의라는 문화 권력의 위계질서를 지탱하는 이념적 토대였다. 수운은 그때까지 지배/피지배 구조를 떠받치고 있던 이념이 그 운을 다했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동학 천도교가 말하는 운(運)이란, ‘끝없이 가고 돌아온다[無往不復]’는 순환 원리를 뜻한다. 최제우는 「교훈가」에서 그 예시로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의 갈마듦을 언급하였고, 손병희는 「명리전」에서 그것을 지배와 피지배 간의 고정적인 위계질서가 변동하는 원리로 설명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서구에서는 니체가 영원회귀를 운명으로 맞이할 때에 비로소 삶 전체를 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전에 헤겔의 역사철학은 인류 정신이 태양과 같이 동양에서 시작하여 서양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과 그 이후에 지속된 서구 근대 문명의 전파로 인하여, 세계인 대부분의 무의식 속에는 서구적 사유와 서구적 삶에의 욕망이 주입되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지구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태양은 서쪽에서 저문 뒤에 동쪽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발상에서 창간호가 나왔다.

 

[다시개벽]은 <다시 읽다>, <다시 듣다>, <다시 쓰다>, <다시 열다>, <다시 잇다>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진다. 먼저 <다시 읽다>는 각 호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이전의 담론과 사상가를 검토하는 부분이다. 조성환의 글은 서구 중심적 사유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성찰하였던 100년 전 잡지 [개벽] 창간호를 검토함으로써 [개벽] 지의 방향과 얼개를 소개한다. 이와 같이 앞으로 1년 동안 『다시개벽』은 [개벽] 지 속에 담긴 독창적 비전을 재조명한다. 김정은의 글은 한국 학문의 식민성을 비판한 해방 이후의 대표 사례로서 조한혜정의 저작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에 관한 리뷰다. 이 리뷰와 관련하여 <다시 듣다>는 조한혜정의 내밀한 목소리를 직접 들음으로써, 삶과 앎의 분열을 극복할 때에만 재미난 삶이 가능함을 재확인한다.

 

<다시 쓰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같은 모든 종류의 모방적‧관습적 학문 풍토를 벗어나, 자생적 학문의 깊이에 근거하여 창조적인 사유를 실험하는 자리다. 홍승진의 글은 서구 이론 중심주의가 현실의 고통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로부터 비롯하였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 의지는 서구 이론 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또한 방민호의 글은 서구에서 제시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식민주의와 마찬가지로 서구 중심적 모델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한국 특유의 언어적‧문학적 고투를 토대로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리즘’ 개념을 정초한다. 마지막으로 차은정의 글은 서구 근대의 우주론에 가려져 있던 인류의 다양한 우주론에 주목하여,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영성(靈性)의 세계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론의 발굴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다시 열다>는 낡은 규범과 제도에 파열을 일으킬 만큼 생기 넘치는 미래의 씨앗이다. 성민교의 글은 서구 중심주의와 관련하여 중심이라는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특정한 중심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이야말로 그 속에 담긴 무한대의 힘을 표출하는 길임을 밝힌다. 또한 김춘규의 글은 사랑을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서구적 지식에의 무비판적 추종은 권력과 페티시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엄중하게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잇다>는 [다시개벽]의 전신인 백 년 전 [개벽] 지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되살리는 작업이다. 이번 호에서는 [개벽] 지 창간호 권두언 <세계를 알라>를 현대어로 풀이하였다. 이 글은 불평등의 과거를 평등의 미래로 개벽하는 흐름 속에서 하나의 국가 또는 하나의 민족과 전 세계가 동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서구 중심주의 극복의 방향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통찰을 던지고 있다.

 

제2호(가을호) 주제는 ‘한국 자생적 사유의 발굴’이다. 한국 고유의 사상을 처음 천명한 신라 시대의 최치원 이래로 한살림 선언, 윤노빈, 김상일, 박동환, 조동일 등에 이르는 자생적‧창조적 사유의 흔적과 흐름을 폭넓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독자들의 자유로운 투고를 기다린다. 형식의 제한은 없다. 1만 자 내외의 간결한 글을 권장하다. 그밖에 창간호에서 문예 분야를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시와 소설, 문학평론과 영화평론 등을 기다린다. 창조적 사유의 길에 첫걸음을 내딛었으니, 더불어 걷고자 하는 벗들이 하나둘 피어나면 곧 우리가 이르고자 하였던 꽃밭을 이룰 것이다.

 

1920년 창간 이후로 한국의 사상과 문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종합지 [개벽]이 그로부터 100년 뒤에 계간 [다시개벽]으로 또 한 번 태어난다. 이전까지는 [개벽신문]이 2011년 4월 창간호부터 2020년 6월 종간호(95호)까지 개벽의 이름을 잇고 개벽의 흐름을 북돋았다. 서구적인 문화와 지식이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시대에서도, 한국 고유의 관점으로 ‘아름다운 세상-행복한 사람-정의로운 연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 그렇게 [개벽신문]이 [다시개벽]을 낳았으니, [개벽신문]의 생명력을 『다시개벽』에서 한층 더 꽃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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